박용덕의 기록 <삼밭재 초막> 검토②

- 건립 연대와 가출 -

글. 이정재

삼밭재 초막의 건립 연대는 처화의 구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그 시기가 기록마다 서로 다르게 전해진다. 건립 시점을 확정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 다르게 전해진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용덕은 “삼밭재 초막을 지은 연대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이설이 있다.”고 하며 다음의 두 설을 제시하고 있다. 즉 <불법연구회 창건사>는 초당 건립 연대를 처화 19세의 일로 한 반면, 주산이 쓴 <대종사 약전>에는 20세로 기록한 것이 그것이다.
<창건사> 제3장 ‘구도의 정성과 고행’의 각주에는 ‘박성삼 열반 전년에 대종사를 위하여 전일 기도장소인 마당바위 부근에 수간의 공부실을 구축하셨고’라 하여 부친상 전 해, 즉 처화 열아홉 살 때 초막을 지은 사실을 기술하였다.

이와 달리 <약전>은 처화 20세 늦가을의 일로 적고 있다.
“곧 수간의 정사를 구성해 주셔서 장차 입택하려 할 즈음에 불행하게도 대종사께서 부친상을 당하게 되었다. 처화가 스무 살 때 늦가을 집을 다 지어 입택하려 할 즈음에 부친이 별세하였다는 것이다. 부친 별세로 인하여 삼밭재 독공계획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초기교단사> 1권 151쪽.)
박용덕은 주산의 기록(<약전>)을 합리적인 설명이라 하였다. 그 이유는 그 초막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동기가 부친의 서거로 인해야만 설명이 자연스럽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두 기록에서 초막의 건립 연대는 1년의 차이를 보여준다. 과연 어느 것이 정확한 기록인가 하는 점은 가출, 부친의 사망 및 수행의 과감한 전환 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고, 나아가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이와 상관시킨 입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특히 처화의 구도에 관한 자세 변환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불법연구회 창건사>와 <대종사 약전>은 각각 초막 건립 일을 1909년과 1910년으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이 둘을 다음처럼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① 19세 초막 건립설
② 20세 늦가을 초막 건립설
초막 건립은 그 시기의 문제를 떠나서 건립 자체의 당위적 문제와도 관련된다. 왜 집을 지어야 했으며, 지어줄 것을 부탁했어야 했고, 또 왜 하필 그 시기였던가 하는 점이다. 모두 시기의 문제와 같이 검토되어야 할 문제다.
②는 늦가을이란 시점이 분명한데 비해, ①은 그 시점이 모호하다. 이로 미루어 ①도 19세 늦가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추정해 볼 수는 있으나 미지수다. 이미 알고 있듯이 ①은 1909년 겨울 부친이 서거하기 일 년 전의 일이고, ②는 바로 직전으로 1910년 서거 당년의 일이다. 먼저 ②는 19세부터 처화가 주문했던 바를 일 년이 지나서야 초막 건립을 완성하였다는 건립 지연의 문제가 야기된다. 건립을 부탁한 지 1년이 훨씬 지나서야 실현이 되었기 때문이다. 평소 부친이 들여온 아들에 대한 정성을 생각할 때 어색하다. 아들의 일이라면 소도 팔아 뒷바라지를 할 정도로 적극적이지 않았던가. 다른 것도 아니고 아들이 염원하는 수행을 위한 공간을 부탁한 것인데 일 년이나 지연을 시켰다 하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왜 이 일을 부친께 부탁을 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짓는 집이 정상적인 것도 아니고 보기에도 초라한 삿갓집 정도였던 것 같은데 이 정도는 처화 자신도 충분히 지을 수 있는 나이이지 않았나 하기 때문이다. 부탁을 한 지 일 년이 다가도록 손을 놓고 기다리고만 있던 처화도 이해되지 않는다. 구도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다 동원한 그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공부를 위해 부탁을 한 것이 아닌가. 마침 첫째 딸도 태어나 집안의 경제가 기울어지는 상황에서 그를 이제 더 이상 방황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건립 지연의 문제는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막 건립은 1910년이 아니라 1909년 늦가을의 일로 봐야 자연스럽다. 

19세 1월에는 처화의 첫 아이(길선)가 탄생한다. 아무리 딸이더라도 집안에서는 큰 경사다. 비로소 처화는 진정한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고 돌봐주는 역할을 처화도 어느 정도는 거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밀려오는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은 누구나 겪어본 이는 알 수 있는 바다. 출산 후 몇 개월은 적어도 가정일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부모는 모처럼 출산을 계기로 귀가한 처화에게 방황을 멈출 것을 종용했을 것이고,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삼밭재에 초막을 짓고 기도를 계속하라고 할 정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때 강증산이 소천한다(1909.6.24.). 그 소식을 전해들은 시기는 아마도 한여름인 7월경이었을 것이다. 강증산은 1909년 6월경에 크게 아프다가 24일 사망한다. 그가 사망하자 그를 따르면서 ‘새 왕국이 건설되고 후천선경이 오면 잘 살아보겠다.’던 꿈을 갖고 있던 수많은 종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익히 증산의 소식을 듣던 처화에게 그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의 커다란 낙망은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라는 탄식에 간절히 깃들어있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 돌아온 자식의 방랑을 걱정하던 부모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더구나 내림에 관한 이야기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터다. 여름의 농번기가 끝나고 추수를 마칠 즈음에 내림을 계획했던 것이다. 처화에게는 집안 친지의 분위기와 외부 상황이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는 뜻을 꺾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기회를 부친은 놓칠 수 없었다. “그리하야 처음에는 생활에 대한 계교심도 혹 있었고(<창건사>)”라는 구절이 이해되는 상황이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바로 굿을 한 후 ‘처사’의 지도에 따라 초막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 계획은 즉시 시행되었고 모친도 적극 나섰다. 처화는 비적극적이었다. 수동적 자세로 돌아가는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가 나서서 초막을 지을 여력이 없었다. 박용덕의 기록대로 ‘초막을 부탁했다.’는 점 또한 상상하기 어렵다. 부탁할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주변의 인도에 따라 할 뿐이었다. 그는 초막이 완성되자 바로 입택하여 겨울이 되기 전 2~3개월 정도의 60~100일 독경 수행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집안은 비로소 안심을 하고, 아들의 ‘처사로서의 성공’을 기대하고 있던 참이다. 독경이 되었으니 물론 처사를 따라 독경일을 얼마간 거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마침 겨울에는 섣달 그믐과 정초 보름 등의 많은 일들이 밀려드는 시기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기간 어느 정도의 인건비로 인한 가계 보탬이 되기도 하였을지 모른다.

다만 그 기간이 길지는 않았을 것이란 추정은 부친의 몸져누움과 관련이 있고, 이원화와의 필연적 만남에서 유추할 수 있다. 독경일도 거의 끝나갈 봄이 오자 처화는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도처에서 들려오는 강증산의 제자들에 관한 소문이 그것이다. 제자들은 각자 교단을 열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한다. 한편 차경석은 천자등극과 새로운 후천 세계를 조판하는 과정을 진행하였고, 전국적으로 대단한 교세를 확장하던 때다. 이런 소식을 처화도 듣게 된다. 그는 다시 강증산의 뜻 후천 세계 이상향의 꿈을 상기하게 된다.

한겨울을 지내며 독경일에 평생을 몸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생활에 대한 계교심도 혹 있었고’에서 보듯, 그는 짧은 외유의 시간을 정리하기로 한다. 그리고 독경 방문의 일은 그의 뜻과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득도와 후천개벽에 대한 열정을 누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상황을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처화는 가출을 결심하게 된다. 집안에 머문다면 한 가정에 매어 독경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처화는 집을 나와 이를 거부했다. 집안은 처화의 회귀를 여러모로 종용했고 부친의 병환은 그를 더욱 압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재도약을 중지하지 않았다. 이 일이 부친이 유명을 달리 하리라고는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부친은 처화가 가출하던 그 해(1910년) 겨울에 운명한다. 처화의 가출은 고타마 싯타르타 가출(四門遊觀相·踰城出家相) 이상의 숭고한 내용이 깃들어 있었고, 그 이상의 고통스러운 결단이 요구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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