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신(也神) 조공진의 ‘의생’ 면허 취득
- 원불교 한의사 제1호 -

글. 박윤철

내가 여섯 살 때 풍(?)으로 죽게 생겼는데 조약방(경산 조송광)이 낫게 해 주어 우리 조부께서 (경산 조송광에게)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겠냐 하니 불법연구회 공부를 해라해서 일가족이 원불교에 인연이 되었다.

위 내용은 <원불교사상연구원 원보> 제19호(1983년 5월 11일 발행)에 실린 박용덕 교무의 <조옥정 백년사> 해제에 나오는 내용으로, <원불교신문> 주필을 지낸 현산 이종원 종사가 증언한 내용이다.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을 역임한 경산 조송광 선진이 김제 원평을 비롯한 전라북도 일대에서 명의(名醫)로 이름이 났음을 짐작하게 하는 귀중한 증언이다.

경산이 당대의 명의로 이름을 날렸음을 뒷받침하는 내용은 <조옥정 백년사> 도처에 등장한다. 곧, “원근 병가(病家)에서 청빙자(請聘者) 허다”라는 내용을 비롯하여, “금구 원평리에 의업상업(醫業商業; 한의원을 겸한 한약방)을 대확창”, “의생(醫生) 면허를 얻어 의규(醫規)를 취급”, “병자 치료하기 위하여 전남 완도를 내려감”, “경성 어떤 병가의 급보로 출선(出鮮; 1932년 5월 28일에 불법연구회 오사카지부에서 조선으로 건너옴)하게 됨” 등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명의로써 경산의 의술(醫術)은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쳐 습득한 것일까? 흥미롭게도 경산의 의술 습득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으면서 시작된다. 이하에 <조옥정 백년사>의 관련 기술을 인용한다.

순창군 피로리 산중에 은신한 바 7~8일만에 수괴된 전봉준 씨도 역시 그 지방에 왔다가 무지(無知)한 김경천(金景天) 자에게 포착되니 따라서 오직이나 간담이 녹는 듯 더욱 은적(隱迹)하고 모든 풍진(風塵)을 근근이 지내어 얼마큼 더 주저(躊躇)하다가 생각하니 천시우로시다변(天施雨露時多變)하고 지인강산로불평(地因江山路不平)이라 천지도 변화커든 인사(人事)야 오직하랴. 앞의 시기를 따라 안심하기 위하여 정읍 유벽(幽僻; 깊은 산중)한 칠보산 아래 장구리(藏龜里; 현재의 정읍시 북면 복흥리 장구마을) 문의(文醫; 문씨 성을 가진 한의사)를 방문하고 의학에 착미(着味; 취미를 붙임)하니… (이하 하략)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경산은 목숨이 위태로운 피신 과정을 거치며 의술에 눈을 뜬다. 역경이 오히려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하나의 전기(轉機)가 된 것이다. 유학과 동학을 거쳐 의술이란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뜬 경산은 1896년부터 본격적으로 의술 수업을 시작하는 바, 외감(外感; 현대의 외과), 내상(內傷; 현대의 내과), 잡병(雜病)편은 말할 것도 없고 부인소아과(婦人小兒科; 현대의 산부인과와 소아과)는 물론 외가서(外家書)까지 두루 열람하여 독파하기에 이르렀다. 경산의 의술 수업에 대한 열정은 특히 1896년부터 1900년까지 4년 동안 주야불문하고 의학서를 읽는 음성 때문에 이웃 집 사람들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독공(篤工) 덕분에 경산은 1900년경부터 명의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여 원근각지 병자가 있는 집으로부터 청빙 받는 경우가 허다하여 경산의 집 앞에는 완쾌된 병자가 치료의 대가로 가져다 준 노마(駑馬; 말)마저 있을 정도였다.

1900년경부터 명의로 이름이 나기 시작한 경산의 명성은 마침내 조선총독부가 1913년 11월 15일에 반포한 ‘의생규칙(醫生規則)’에 따라 1914년 10월 9일자로 ‘의생’(醫生) 면허를 취득함으로써 사회적 공인을 받기에 이른다. <조선총독부관보> 657호(1914년 10월 9일자) 8면의 ‘의생면허’ 란을 보면, “2137 김제군 수류면 원평리 조공진 명치 9년 5월 10일”이라는 내용이 나온다.(사진 별색표시 참조) 2137은 의생면허 번호를 말하고, 김제군 수류면 원평리는 경산의 주소, 조공진은 경산의 호적명, 명치 9년 5월 10일은 경산의 생년월일을 가리킨다. 경산이 총독부로부터 ‘의생’ 면허를 취득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료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독학으로 터득한 경산의 의술 수준이 당대 의료계로부터 당당하게 공인받을 정도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경산의 의술을 인정하여 ‘의생’ 면허를 허가해 준 ‘의생규칙’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해 두기로 한다.    

‘의생규칙’은 일제가 1910년에 조선의 국권을 강제로 탈취하고 나서 식민지 조선인들을 ‘수탈’하기 위한 최소한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1913년 11월 15일에 반포했다. 1910년대 식민지조선은 서양식 교육기관에서 배출한 의사가 태부족이었던 반면에 전통의학 곧 한의학에 대한 식민지 조선인들의 신뢰가 돈독한 것에 착안하여 ‘의생’(醫生) 제도라는 과도기적 제도를 두기 위해 ‘의생규칙’을 반포하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령 제102호로 반포된 ‘의생규칙’에 따르면, 조선인으로서 의생이 되고자 하는 자는 20세 이상이어야 하고, 의생규칙 시행 이전에 적어도 2년 이상 의업(醫業)에 종사한 자이어야 하며, 시행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이력서와 민적등본(호적등본) 또는 초본을 첨부하여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앞으로 신청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박지현, ‘식민지기 의생제도와 정책의 운영’, <대동문화연구> 106쪽, 2017 참조.)  

<조옥정 백년사> 말미에는 자신의 의술에 대해 경산이 얼마나 자부심을 가졌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의생(醫生) 일본 대정(大正) 15년 병인 6월 3일 면허 야신(也神)”이라는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기술은 경산이 면허를 취득한 해를 대정 15년 곧 1926년으로 기술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조선총독부관보>의 면허 취득 일자 1914년 10월 9일보다 무려 12년이나 뒤늦게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왜 면허 취득일자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지금으로서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 향후 해명할 과제로 남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스스로 붙인 ‘야신’(也神)이란 호에 주목해 보자. ‘야신’이란 호에는 아무래도 경산이 자신의 의술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드러내고자 스스로 붙인 호인 듯하다.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한 바 있다.

‘야신’ 경산은 1900년 9월에 김제군 수류면 원평리에 개업한 한의원과 한약방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1925년 2월 16일 야반에 일어난 화재로 ‘각항 물품과 약재와 각 서적을 전부 소화(消化)’ 당하는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경산은 ‘인명 손해 없음을 다행으로 알고’ 다음과 같은 새로운 결심을 한다.
천강대복(天降大福)에 필선견소재이시지(必先遣小災而試之)라 하였으니 내게 혹시 영광 받들 기회가 불원(不遠)하리라 특별 안심하고 그대로 진행하다
    화재로 인해 물질 손실을 크게 입은 경산에게 하늘이 내리는 큰 복은 뜻밖에 빨리 찾아온다. 큰 복이란 바로 야신 조공진이 불법연구회에 정식으로 입교원서를 제출하고 “박 선생님(소태산 대종사)에게 여년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원불교 최초의 공인(公認) 한의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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