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天道), 인도(人道), 치도(治道)로 구성된
<도덕경>

 글. 김정탁

<도덕경>은 노자가 쓴 책인데 그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의문에 가려있다.
노담(老聃)이라는 설이 있고, 이이(李耳)라는 설이 있고, 심지어 실존 인물인지 여부에 대한 의문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을 <노자>라고 부르지 않고, <도덕경>으로 부르는 건 어째서일까? 장자 책도 <장자>라고 부르고, 맹자 책도 <맹자>라고 부른다. 물론 <장자>는 당나라 현종(玄宗)에 의해 한때 <남화경(南華經)>으로 추존되어 불렸지만 <장자>가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하다. 또 경(經)이라고 말할 땐 책의 격을 높이는 일이다. 성경은 물론이고, 불경의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도 이런 이유로 모두 경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도덕경>이라고 말할 때는 <노자>에 비해 격을 높이는 일이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 중에 하필 ‘도덕을 말하는 경’으로 이름 붙였을까? 가장 오래된 판본 중 하나인 마왕퇴(馬王堆)에서 발견된 백서본(帛書本) <노자>가 도(道)와 덕(德) 두 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그보다는 도와 덕이 동아시아 고대사상을 대표하는 개념이기에 노자가 이에 기초해서 자신의 사상을 편 거라고 본다. 그러니 노자는 ‘도덕’이란 중요한 말을 선점한 셈이다. 따라서 장자는 물론이고, 공자나 맹자도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책을 ‘도덕경’이라고 얼마든지 이름 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도와 덕이 어떤 내용이기에 동아시아 고대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어로 자리 잡았을까?

도(道)는 우주자연의 궁극적 실체 내지 근본 원리이다. 그런데 여기서 도의 내용을 두고 노자와 장자 사이에 차이가 발견된다. 노자는 궁극적 실체를 강조하는 반면 장자는 근본 원리에 비중을 둔다. 노자가 도의 궁극적 실체를 강조하는 내용은 <도덕경> 1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유명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로 운을 떼는 내용이 그걸 설명한다. 이에 반해 장자는 무위(無爲)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자연의 원리를 도의 원리로 파악한다. 참고로 서양사상은 궁극적 실체를 강조하는 측면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서양사상은 플라톤의 이데아 내지 신(神)을 궁극적 실체로 보는데 익숙하다. 신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그래서 신을 인간은 물론이고, 우주자연의 모든 걸 아우르고 주무르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만들었다.

덕(德)은 도가 구체적으로 인간이나 사물 안에서 구현될 때 얻어지는 힘과 같다. 우리는 이를 흔히 덕성(德性)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덕성의 내용을 두고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와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 사이에 차이가 발견된다. 도가는 자연스런 덕성, 즉 타고난 본성을 강조하는 반면 유가는 인위적으로 구현된 덕성,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걸 강조한다. 이것들의 차이는 유가와 도가를 구분 짓는 결정적 사안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어떤 주장이 옳을까? 즉 타고난 본성이 덕의 참 모습일까? 아니면 인의예지로 꾸며진 게 덕의 참 모습일까? 이에 대한 답을 올바로 얻으려면 도(道), 즉 다니는 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구해봐야 한다.

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람이 다니다 보니까 저절로 생겨난 길이고, 다른 하나는 측량과 공사를 통해 사람이 만든 길이다. 저절로 생겨난 대표적인 길로는 오솔길을 들 수 있고, 만들어진 대표적인 길로는 차가 다니는 도로를 들 수 있다. 차가 다니는 길은 오로지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길인데 이는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었다. 반면 오솔길은 구불구불해도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과 거기에 이르는 육체적인 힘듦을 가장 이상적으로 조합해서 생겨난 길이다. 이 길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저절로 만들어졌다. 노자와 장자는 오솔길과 같은 자연스런 덕성을 강조한다면 공자와 맹자는 차가 다니는 길과 같은 인위적인 덕성을 강조한다. 

이에 장자는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즉 길은 사람들이 다니다 보니까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게 무위(無爲)가 지닌 위대한 힘이고, 자연만이 이 무위를 제대로 실천한다. 그래서 무위란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연이 하는 것처럼 하고자 하는 바 없이 이루는 일이다. 이에 반해 유위(有爲)란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서 하는 일이다. 유위를 행하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래서 인위(人爲)란 말이 생겨났는데 인위가 지나치면 작위(作爲)로까지 변한다.

이처럼 무위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의 원리가 도의 성격이고, 또 자연처럼 드러나지 않고 소박한 모양을 지닌 게 덕의 참 모습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현덕(玄德), 즉 드러나지 않는 덕이라고 말한다.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참된 덕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한다. 반면 수준이 낮은 덕을 지닌 사람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기에 진실로 덕이 없다. 그러니 노자나 장자가 볼 때 인의예지 따위의 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을 보면 진실로 덕이 없다고 보아질 뿐이다.

동아시아인은 이런 도와 덕을 놓고 오랫동안 궁구해 왔는데 이것이 동아시아 학문을 형성했다. 즉 도의 원리를 밝히고, 또 밝혀낸 도를 익혀 체득함으로써 덕의 단계에 이르는 게 학습(學習)의 궁극적 목표이다. 그러니 도가 배움, 즉 ‘학(學)’의 차원이라면 덕은 익힘, 즉 ‘습(習)’의 차원에 각각 해당한다. 천도(天道), 인도(人道), 치도(治道)는 학의 구체적 결과이다. 천도가 우주자연의 원리를 파악한다면 인도는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치도는 가정과 세상을 다스리는 길을 밝힌다. 이런 구분은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으로 나누는 서구의 학문관과 비교된다. 즉 천도가 물리학, 화학, 수학과 같은 자연과학이라면 인도는 문학, 철학, 사학과 같은 인문과학, 그리고 치도는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과 같은 사회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관 사이에 차이도 분명 존재한다. 먼저 동아시아의 천도가 다루는 범위가 무한정이라면 서구 자연과학의 범위는 천도에 비해 제한적이다. 또 서구의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현실을 기술하고 이에 입각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차원에 머문다면, 동아시아의 인도와 치도는 인간과 사회가 가야할 길, 즉 당위론적 성격을 보다 중요시 여긴다. 또 서구의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은 독립적으로 발달되어 서로 간에 연결성이 부족하다. 반면 동아시아의 천도, 인도, 치도는 서로 간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즉 천도에 입각해서 인도를 밝히고, 인도에 기반해서 치도를 구현한다. 그러니 모든 학문이 천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하느님(天)의 의미가 동아시아인의 마음에 얼마나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도덕경>도 동아시아사상을 다루는 여타의 고전들처럼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 결코 쉽지 않다. 아마도 <장자>와 더불어 가장 어려운 책이라고 평가될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보면 <도덕경>이 <장자>보다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겉으론 <장자>가 어려운 것처럼 보여도 전체 설계도를 파악하고 나면 그 어려움이 술술 풀린다. 반면 <도덕경>은 겉으론 쉬운 것 같은데 들어갈수록 내용이 어려워진다. <도덕경>에 대한 해석서가 동아시아 여타 고전들에 비해 많다는 것도 단적인 증거 중 하나이다. <도덕경> 해석이 그만큼 까다로워서이다. 

이런 까다로운 <도덕경>도 푸는 데 있어 단서가 있다. 먼저 <도덕경> 내용을 우주자연의 궁극적 실체로서의 도와, 그 도의 실천을 통해 체득하는 덕으로 구분하는 일이다. 이 작업은 마왕퇴 백서본에서 밝혀진 것처럼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진 일이라 지금 와서 새삼 애쓸 필요는 없다. 그러니 남은 작업은 <도덕경> 내용을 천도, 인도, 치도로 구분해서 살펴보는 일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도덕경> 1장은 천도, 2장은 인도, 3장은 치도에 대한 윤곽을 전체적으로 그린다. <도덕경> 중에서도 1장, 2장, 3장 내용은 특히 난해해서 학자들마다 견해를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천도, 인도, 치도의 차원에서 제각각 파악하고 나면 그 해석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도덕경>의 나머지 장들은 1장, 2장, 3장의 부연설명일 뿐이니 해석이 그만큼 깔끔해지게 마련이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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