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 선물

글. 김수진

사무실에서 일하다 삐끗해서 발가락을 다치고 말았다. 점점 부어오르고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사무실 동료가 병원에 가자고 성화다. 하는 수 없이 동료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가보니 발가락에 금이 갔다고 한다. 생각보다 부상이 심해서 깜짝 놀랐다. 발가락 쪼끔 다쳤는데 종아리까지 반깁스를 하고 나니 어마어마하게 다친 것 같아 창피했다. 함께 가준 동료직원에게 고맙다고 연신 인사했다. 그분이 병원에 끌고 가주지 않았으면 금 간 줄도 모르고 쩔뚝거리며 신나게 돌아다니다 결국 더 탈이 났을 것이다.
그 길로 퇴근을 했다. 집에 들어서니 맞아주러 나오던 신랑이 나의 느닷없는 깁스 사태를 보고는 사색이 되었다. “보기만 이렇지 쪼끔밖에 안 다쳤어요.”라고 말해도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니, 오히려 다친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이제 여름 내내 새로 산 예쁜 샌들도 못 신고 멋도 못 부리겠구나.’ ‘쉬는 날에는 꼼짝없이 집에만 갇혀 있어야겠구나.’ 하는 답답한 마음만 들었다. 감사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니 억지로라도 ‘사은님이 주신 모든 것이 소중하듯 발가락 하나하나도 이렇게 소중하구나. 건강하게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천지님께 감사하다.’며 마음을 다독여 보기도 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밖에 자유로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째 멍청하게 발가락을 다쳐서 이 고생인지 자신이 한심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발을 다친 그날부터 온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어지간한 일에는 열외다. 직장에서는 외근 나갈 일이 있으면 나 대신 다른 사람이 나가고, 점심시간에도 움직이면 안 된다고 나를 위해 다들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다. 직원들은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고, 주말에 근무라도 할라치면 대신 근무해주겠다며 다들 본인 스케줄을 점검한다. 집에서 신랑은 내가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일까 매 순간 노심초사다. 침대, 소파, 화장실 이외에는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한다. 밥을 차려주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내가 더울까 봐 에어컨을 틀었다가 추울까 봐 선풍기 틀었다가…. 내 다리가 부었다고 매일 밤 정성 들여 마사지도 해준다. 발가락을 다치고 나는 요즘 공주며 왕비가 되었다.
이러니 어찌 발가락을 다쳐 불편한 것만 생각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받고 있고 사람들이 나를 아껴주고 있다는 것을 매 순간 느끼며 이토록 행복한데 말이다. 내 주변의 모든 인연에 너무나 감사하고 내 인생에 매우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깊이깊이 깨달았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고 힘든 나에게 사은님께서 선물을 한 아름 안겨 주신 듯하다. ‘너는 이토록 소중한 사람이고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니, 이번 기회에 잠시 쉬었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렴.’ 하고 말이다. 다친 일이 나에게는 오히려 은혜와 감사를 느끼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오늘도 선물 한 아름 안고 기쁘게 출발이다.


감사하고 순조로운 하루

글. 최은진

유월 어느 날 교무님과 통화를 하다가 “우리 집에 함안 사돈댁에서 보낸 상치(상추)가 있다.” 했더니, 맛나겠다고 하시어 간단한 점심을 함께 먹게 되었어요.
식사를 하고 상화 씨와 셋이 차를 마시면서 “함양 상림공원 연꽃이 너무 좋을 것 같던데 우리교당 나들이 법회를 하면 어떨까?”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며 교도들과 의논해보라 하셨지요. 가장 먼저 서연 씨가 좋은 생각이라며 모두들 뜻에 따르겠다고 답이 왔어요. 회장님도 의논하자고 하여 나들이 법회로 통과가 되었네요.
7월 7일 법회가 다가와 출발을 하려는데 교도들이 안보여 교무님께 여쭈었더니, “시타원님과 원국님은 아파서 못 오시고, 경인님은 직장 가고, 제일 처음 반겼던 서연 씨는 가게 일로 못 간다.”고 하시니 순간 요란해지면서 또 후회가 되었어요. ‘상화씨도 시간상 못 오는데 내가 괜한 일을 만들었나….’
교무님과 단장님께서 상화 씨가 안 오면 안 된다고, 시간을 조금 늦추자고 하여 어찌 맞추었더니, 8명이 출발할 수 있었지요. 우여곡절 끝에 행복 시작! “우~와,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도 뒤로 하고 웬 날씨가 이렇게 좋을까?” “우리들이 누군데. 소태산 대종사님의 심통제자들이 아닌가?” 바람이 솔솔, 구름 친구가 동행을 하고 자연 친구들이 우리를 반기네요.
두어 시간 남짓 달려가니 상림공원, 연꽃이 우리를 맞이하고, 숲을 따라 연꽃을 따라 조잘조잘 연꽃 향기, 숲의 냄새 맡으면서 즐김을 시작했지요. 주차장으로 돌아올 땐 숲길을 택해 진산 회장님의 선두로 묵언행선을 하면서 오니 어찌 그렇게 맞아 떨어지던지요.
머루 터널, 다래 터널 지나 다시 출발! 함양 백전면에 있다는 ‘식영정’. 최명원 교무님이 계신 곳으로 향하는 길엔 싱그러운 벚나무잎 터널이 끝없이 펼쳐지네요. 원불교 교도가 만든 안심정 법당에 일원상을 모신 후 우리가 첫 손님이라니 또 감회가 깊었어요. 법회 후 운타원님표 냉면을 바람, 산소와 함께하며 먹으니 얼마나 맛있던지요!
식영정을 떠나 ‘뱀사골’로 가는 중, 교무님께서 동기교무님과 통화를 하더니 운봉수도원에 계신 경산 상사님을 뵈러 가자고 하시네요. 뱀사골은 맨날 갈 수 있지만 스승님 뵙기는 어려운데 또 이런 영광이!
경산 상사님께서는 우리에게 딱 맞는 법문을 해주셨어요. ‘모든 일은 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므로 남편·아내·자식 모두 부처 보듯이 하고, 돌아가는 길을 잘 닦아야 후생에 또 잘 태어난다.’는 말씀을 받들며 더 공들여야겠다는 마음을 챙기게 됐지요. 경산 상사님께서는 법문으로 이미 감동을 주셨는데, 부부들을 곁에 앉게 하시어 기념촬영까지 해주시니 감개무량했어요. 그러고 보니 운봉수도원 경치도 절경이네요.
우리의 삶터로 돌아오는 길. 이렇게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하루가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첫 여행

글. 김정은


2015년 5월의 막바지가 될 무렵, 동생은 내게 한 달간 유럽 여행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덜컥 그 제안을 수락했다. 우리는 서로의 취향을, 습관을, 기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린, 여행한 지 4일 만에 아주 ‘대판’ 싸웠다. 동생은 여행에서 자신이 내디딘 길 위의 분위기나 공기, 햇볕이나 바람 따위에 큰 의미를 뒀다. 난 공원보단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좋았고, 그 나라 역사를 공부한 후 움직이는 게 좋았다. 결국 여행을 시작한 지 4일째, 런던의 프리마켓에서 우린 아주 쿨하게 찢어지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나간 순간부터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우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뭔가 굉장히 외로워졌다. 여행을 혼자 해서 외로운 것도 있었지만, 동생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 그 오만이 나를 외롭게 했다.
영국에서의 일정이 막바지에 달할 무렵, 동생은 나와 함께 벨기에로 넘어가는 기차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차피 벨기에의 호스텔에서 만날 테지만, 이동하는 시간은 따로 떨어져 있고 싶다는 말이었다. 사건은 그때 발생했다. 내가 벨기에에 도착해 호스텔로 이동하려는 순간, 소매치기가 내 가방을 훔쳤다. 지갑 속 카드에는 여행 경비 대부분이 들어있었고, 카드 명의는 동생이었기 때문에 정지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벨기에 경찰까지 조우해야만 했다. 어두컴컴한 경찰서 안에서, 통하지 않은 언어로 손짓·발짓을 해가며 그들과 대화했다. 경찰서를 나와 홀로 벨기에의 밤거리를 걷는 순간, 턱 끝까지 울음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제야, 도착하지 않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동생이 생각났다.
여차여차 호스텔의 체크인을 하고, 예약했던 방으로 올라가려 하는데 울음소리가 들렸다. 동생이었다. 내가 동생의 어깨를 툭툭 치자, 동생이 나를 올려다봤다. 동생이 울며 내게 소리를 질렀다. 동생은 내가 연락되지 않자, 불안감에 온갖 상상을 했다고 전했다. 동생은 대사관에 연락해 언니가 위험에 처한 것 같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동생이 울음을 그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웃기 시작했다. 민망했던 상상들과 예기치 못한 도난에 대한 일종의 해소의식이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져버리는 것 말이다.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아주 다르더라도, 우린 여전히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있구나. 상대를 다 알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동생은 동생이었고, 낯선 이국의 땅에서 나를 위해 엉엉 소리 내어 울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나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타인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만임을 깨달았다. 그러해서 우린 늘 지지고 볶고 싸우고 화해하며 그 누군가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다소 유난스러운 그 과정이 우리를 외롭지 않게 만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꿈에서 만나요

글. 김보선

녹음이 짙어지고 잦은 비 덕분에 계곡에 물이 넉넉하게 흐르는 배내골에서는 매년 여름과 겨울,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숲속학교, 산골학교가 진행된다.
올해는 서울, 경기, 경북과 경남지역의 초등학생들과 중·고등학생으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이 2박 3일 동안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공부하였다.
참여한 훈련생 중에는 예비초등학생도 있다. 언니, 누나, 오빠, 형을 따라 온 미취학 아동들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7세 남녀아이가 참여하였다. 그 아이들은 손위형제 덕에 말도 잘하고, 글을 읽거나 쓰는 능력이 초등학생들과 다르지 않다. 프로그램을 따라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달라진다. 이번에도 밤이 되자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우는 아이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다른 방에서 달래본다. 아이는 우는 중에도 또렷한 목소리로 엄마에 대한 이야기, 아빠 이야기 등을 들려준다. 아이가 훈련을 하고 있다는 상황을 인식하고 잘 수 있도록 유도하는데 아이가 먼저 “얼른 자야겠어요. 꿈에서 엄마 만나야겠어요.”라고 한다. 울면서 말을 반복하는 아이에게 “이렇게 울다가는 꿈에서 엄마 만났는데 목소리가 안 나와 이야기 못하겠네.” 하니 바로 눈물을 그친다.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부러웠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다.’라는 그 마음에 뭉클해졌다. ‘나는 꿈에서라도 스승님을 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보자 그 간절함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올해 맡은 일을 수행하면서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어떠셨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하게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향타원 박은국 종사님을 통해 육성으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좀 더 가깝게 다가오신 스승님!
‘꿈에서라도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 회상을 여신 그 큰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 회상에서 조그마한 역할을 하면서 보은할 수 있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소태산 대종사님과 인연을 맺게 해주신 이미 열반에든지 오래이신 아버님께 감사합니다.’
간절함이 감사로 이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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