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실 박씨’ 가문의 독립운동

- 동경유학생 영산 박영식의 사례 -

글. 박윤철

1916년의 개교(開敎)이래 10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근대한국의 개벽종교(開闢宗敎) 원불교 역사 속에서 전라북도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好谷里) 출신의 ‘홈실 박씨’ 가문이 차지하는 위상은 아주 특별하고 특별하다.
원불교 교단 안에서 ‘홈실 박씨’ 가문은 일제강점기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원불교에 귀의하여 원불교 기본경전 결집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던 상산 박장식 종사(1911~2011)를 비롯하여, 일찍이 일본 유학시절인 1919년 2월 8일에 동경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2.8독립선언을 주도한 리더의 1인으로 참가했던 영산 박영식(1897~1977), 원불교의 일본포교 역사에서 개척자적 역할을 수행했던 곤타원 박제권 종사(1925~2015), 국내외에서 ‘가난한 이웃들의 어머니’로 널리 알려진 서타원 박청수 종사(1938~현재) 등 걸출한 교무들을 배출하였으며, 그 외 홈실 마을 일대에서만 50여 명이 원불교 교무가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그간의 원불교 100년사는 ‘홈실 박씨’ 가문이 원불교 교단 내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위상을 강조하면서도 ‘중차대한’ 사실 하나를 간과해왔다. 그것은 바로 ‘홈실 박씨’ 가문이 19세기 후반의 한말개화기로부터 20세기 전반의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국권 수호와 그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대를 이어 헌신해 왔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한국 역사학계에서도 ‘홈실 박씨’ 가문의 독립운동의 상세한 전말은 아직 제대로 밝혀진 바 없고, 원불교학계에서는 더더욱 주목받지 못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다행히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2019) 2월 14일 ‘원불교와 독립운
동’이라는 주제로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이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처음으로 ‘홈실 박씨’ 가문의 독립운동을 다룬 김봉곤의 논문 <남원 박주현 가문의 항일운동과 원불교>가 발표됨으로써 ‘홈실 박씨’ 가문의 독립운동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홈실 박씨’ 가문의 독립운동은 영산 박영식(본명 정식)과 상산 박장식(본명 천식)의 조부인 송곡 박주현(1844~1910)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다시 영산과 상산의 부친인 정와 박해창(1876~1933)으로 계승되었다가, 마침내 송곡의 큰 손자인 영산 박영식이 1919년 2월 8일에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발기인으로 참여함으로써 결정적 계기를 맞이하였다.

필자는 1975년 3월에 원광대 원불교학과에 입학한 지 며칠이 채 되지 아니한 따뜻한 봄날, 현 원불교 중앙총부 구조실(舊祖室) 앞을 산책하고 계신 영산님을 뵌 적이 있다. 그 무렵 영산님은 <일원상대의>라는 원불교학 관련 저서를 막 출간한 직후였고, 그 책을 기증받은 필자는 책 말미에 적힌 저자의 이력을 통해 영산님이 일찍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신 엘리트 지식인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2.8독립선언에 깊숙이 참여한 독립운동 경력을 가진 어른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영산님이 독립운동 경력을 소유한 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은 7~8년 전에 연산 김학인 교무님으로부터 영산님이 일본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근거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이후였으니 만시지탄이라는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을 만큼 무지(無知)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무지를 면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마침내 영산님의 2.8독립운동 참여 사실을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다수의 원(原) 사료를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영산 박영식, 본명 정식(政植, 일부 기록에는 正植)의 2.8독립선언 참여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원 사료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일본어로 쓰인 <불령단 관계잡건 조선인(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의 부(部) 재내지삼(在內地三) 특고비을(特高秘乙) 제56호 조선유학생(朝鮮留學生)의 독립운동(獨立運動)에 관(關)한 건(件)>(1919년 2월 10일)이다. 이 사료는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에 접속하여 ‘박정식(朴政植 또는 朴正植)’이라는 키워드를 치면 바로 검색이 가능함과 동시에 무료로 출력이 가능하다.
앞에서 인용한 김봉곤의 연구에 따르면, 영산의 2.8독립선언 참여 사실은 큰 따님인 곤타원 박제권 종사의 증언과도 일치하며(김봉곤, 위의 논문, <원불교와 독립운동>,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128쪽), 그 외에 대전광역시에 소재한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영산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현재, 대전의 국가기록원에서 확인되는 영산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은 모두 3건이다. 3건 모두 형사사건부(刑事事件部) 문서인바, 첫 번째 문서는 “박정식 24세 전라북도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전주지검남원지청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이송 판결날짜 1920년 5월 24일 관리번호 CJA0019496”이라는 내용으로 검색되며, 두 번째 문서는 “기소중지 불기소 판결날짜 1920년 6월 14일 관리번호 CJA0019496”, 세 번째 문서 역시 “동경이송 판결날짜 1920년 10월 23일 관리번호 CJA0019496”이라는 내용으로 검색 가능하다.

이상, 관련 사료를 종합하여 보면, 영산이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위에서 예로 든 <불령단 관계잡건 조선인의 부 재내지삼  특고비을 제56호 조선유학생의 독립운동에 관한 건>에 따르면, 영산이 2.8독립선언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1919년 1월 6일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사진 참조)에서 조선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열린 웅변대회 때부터로 확인된다. 이하 관련 내용을 인용한다.         
 
(1919년 1월) 6일 청년회관에서 개최한 웅변회(모인 인원 200명)에서는 윤창석, 서춘, 이종근, 박정식(朴正植, 영산), 최근우, 김상덕, 안승한, 전영택 등이 교대로 일어나서 현재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이 독립운동을 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의 동포도 이미 각각 실행운동에 착수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구체적으로 운동을 개시해야 한다고 연설하고 그 자리에서 우선 우리의 의사를 전달할 내각의 여러 관료 및 각국 대공사에게 청원을 하는 등 실행운동에 착수할 것을 결의하여 다음의 임시위원을 뽑아 운영위원을 강구하게 하였다. 다음날 오후 1시에 다시 청년회관에서 만나기로 하고 산회했다. 

영산은 1919년 1월 6일의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그 구체적 실행운동에 착수한 바, 2.8독립선언 당시에는 11명의 유학생 대표와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최팔용의 사회, 백관수의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이어진 2.8독립선언에서 영산을 비롯한 조선 유학생들은 조선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서 역사상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음을 천명하고, 일제(日帝)의 사기와 폭력에 의한 국권탈취의 불법성과 야만적인 침략정책을 고발하였으며, 지난 10년간의 식민지통치가 상호이해에 상반됨과 동시에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하여 독립을 주장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양평화의 견지에서 볼 때 소련이나 중국이 군국주의적 야심이 없음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구실이 없으며, 만일 일제가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계속한다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일제에 대해 혈전을 전개할 것이며, 우리 민족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를 건설하여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에 공헌할 것을 선언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3.1독립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 2.8독립선언. 바로 그 주역의 한 사람이 ‘홈실 박씨’ 가문의 영산 박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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