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원광>이달의원광
 
제목 : 단순 소박하지만 자비로 충만하게 2019년11월호

떼제공동체 안선재 수사
단순 소박하지만 자비로 충만하게
취재. 장지해 편집장


영국에서 태어나 프랑스, 필리핀을 거쳐 한국까지 오게 된 그의 삶은, 고은 시인의 소설 <화엄경>에서 세상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이들에게서 가르침을 얻는 선재 동자와 닮았다. 한국으로의 귀화를 선택할 즈음 마침 <화엄경>을 번역하고 있던 그는,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선재’로 선택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 임에도 그는 자신의 연구실을 ‘암자’, 자신을 ‘스님’이라고 표현한다. 커피는 아예 마시지 않고 차(茶)를 즐기며, 한국의 옛 문화와 멋을 좋아한다. 수사는 수도회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하는 남성을 이르는 말인데, 한자를 풀이하면 ‘수행하는 선비’라는 뜻이다. 떼제공동체 안선재 수사(세례명 안토니, 서강대학교 명예교수)에게는 ‘수행하는 선비’라는 말이 그야말로 딱이다.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 루터교, 성공회 등의 모든 그리스도 교파를 아우르는 ‘초교파 수도공동체’인 떼제공동체(Taiz)는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약간 낯선 존재이다. 하지만 본당이 있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이 마을 이름이 떼제다.)은 195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매년 10만 명가량의 전 세계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젊은이들의 성지이자 안식처’이다. 그리스도교 외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는 사색과 명상의 공간이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떼제공동체의 존중과 일치 정신은 그리스도교 내에 한정되지 않는, 미래 종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듯하다.

● 떼제공동체를 소개해 주세요.
“떼제공동체의 핵심 비전은 ‘화해와 일치, 그리고 평화’예요. 중요한 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모여 살며 기도와 나눔의 생활을 해나가는 거죠. 어떤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시작되지 않았고, 그저 일치와 사랑을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할까를 고민해요.”

떼제공동체 설립자 로제 수사는 스물다섯 살이던 해(1940년)에 프랑스 작은 마을인 떼제에 홀로 정착했다. 당시 유럽 내 여러 혼란스러움 속에서 ‘사랑’을 말로만이 아닌 현실에서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게 지금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처음엔 혼자였지만, 점점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생겨나면서 1949년 부활절에 7명이 공동생활과 단순·소박한 삶을 살겠다는 뜻을 세우고 종신 서원을 했고, 현재 떼제공동체의 수사는 100여 명이다.

● 수사님께서는 한국문학 번역가로도 유명하신데요.
“한국문화를 좋아해요. 한국문학 중에는 시를 특히 좋아하는데, 한국 시는 인간적이고 그 안에 진실함과 소박함이 잘 담겨있어요. 시인들도 많이 알고, 번역 시집은 5권이나 냈죠.”

번역되지 않아서 한국의 좋은 시를 세계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워 번역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그. 1990년대 초반부터 그가 번역한 한국 문학은 천상병의 <귀천>을 비롯해, 구상, 고은, 서정주, 신경림, 이문열 등의 대표작들까지 무려 30여 편에 달한다. 2008년 문화훈장을 비롯해 대한민국 문학상 번역상, 대산문학상 번역상 등을 받기도한 그. 안 수사는 본래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중세·근대 영문학을 전공했다. 박사학위를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에 갔다가 떼제공동체를 만났는데, 당시 다이나믹하고 시원한 분위기와, 떼제의 노래를 기쁘고 아름답게 함께 부르는 모습이 인상에 깊이 남았다고. 이후 진로를 고민하다가 첫 방문 3년 뒤인 1969년에 다시 찾아가 수사 서원을 했다. 1980년 5월에 한국으로 들어왔으니, 한국 생활은 올해로 꼭 40년이 되었다. 1994년에는 귀화해 한국인이 됐다.

● 떼제공동체의 핵심이 함께 부르는 떼제의 노래와 묵상기도라고 하던데요.
“사실 1950~60년대까지도 프랑스 주교는 시편*도 라틴어로만, 찬송가도 그레고리안**만 허용됐어요. 그런데 로제 수사는 시편도 앞으로는 불어로 불러야 한다고 했고, 예수회 신부님과 함께 실험적으로 새롭고 심플하게 시편을 부를 수 있게 만들었죠. 기도는 아침·점심·저녁 하루 세 번, 노래 부르고 묵상하고, 말씀 있고 묵상하고, 또 다시 노래 부르고 묵상하는 식으로 이뤄져요. 아침엔 40분 정도, 점심엔 생활을 하다 보면 짧게 20분 정도, 저녁땐 끝이 없죠.”

떼제공동체의 묵상기도를 처음 접한 이들은 이 시간을 꽤 어색해한다. 늘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보고, 듣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 하지만 안 수사는 ‘침묵’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저 ‘주님 앞에’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으로 여기라는 것. 침묵하며 뭔가를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묵상의 시간이 쉼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침묵 속에서 갈등이 화해되는 경험이 있기도 한다는 것.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식의 거창한 게 아닌, 그냥 그대로 주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 떼제의 일치와 화해 정신은 우리나라 종교들에게도 매우 필요한 정신인데요.
“떼제공동체는 전 세계적으로 1월에 개신교, 천주교가 모여서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주간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꾸준히 못하고 있어요. 생각은 하는데 시작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우린 그걸 바꿀만한 힘을 가지지 못해서(웃음), 부분 부분에서 마음이 맞고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람(또는 종교)들끼리 모임을 갖거나 일을 하고 있어요.”

‘떼제공동체는 개신교도 아니고 가톨릭도 아니죠?’라는 질문에 ‘둘 다.’라고 답하며 ‘아니고 말고 할 게 없다.’고 말하는 안 수사. 내심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을 강조하고자 던진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충격이었다. 개신교 출신 수사도, 천주교 출신 수사도, 성공회 출신 수사도 그저 공동체 일원으로서 함께 하는 것일 뿐, 속하거나 속하지 않음을 규정하는 것조차 떼제공동체에서는 의미 없음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 젊은이들이 프랑스 떼제공동체를 찾아오는 이유가 뭘까요?
“떼제공동체의 시작에 ‘젊은이들을 찾아오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의미가 뭔가?’ 하는 질문을 가진 청년들이 하나둘 먼저 찾아왔죠. 사실 우리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삶의 의미, 희망, 신뢰, 화해… 등에 대해 오히려 질문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죠. 하지만 젊은이들의 질문과 우리가 가진 질문이 똑같아요. ‘산다는 건 무엇이고, 나(우리)는 무슨 기대(희망)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내(우리)가 살아가는 것과 신앙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어떻게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요.”

말은 그렇지만, 사실 프랑스 떼제공동체에서는 저녁 기도가 끝나면 수사들이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며 청년들이 언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배려한다. 고해성사와는 엄연히 다르다. 이들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무거운 짐, 다친 마음,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면 수사들은 들어줄 뿐, 해결해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말은 그저 복음의 한 마디, 주님의 사랑 한 마디가 전부이다. 안 수사는 “전 세계에서 모인 젊은이들끼리 각자의 체험을 주고받으며 서로 희망을 주기도, 받기도 하는 게 무엇보다 큰 동력인 것 같다.”고 덧붙인다.

● 앞으로의 시대에는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예수께서는 ‘어떤 종교’를 만들기 위해 오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사랑’을 중심으로 올바르게 살 수 있게 하려고 오셨죠. 삶의 의미에도, 종교에도, ‘사랑’이 빠지면 나쁜 거예요.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이고, 남을 아프게 하는 그런 종교는 없어져야 해요. 자비가 있어야 해요. 남을 이해하고, 심판하지 않고, 인정하고, 듣고…. 떼제의 노래 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제목이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다.’예요. 웨얼 이즈 갓?(Where is god?)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우리끼리 사랑의 나눔이 있다면 거기에 계세요. 사랑의 나눔있는 그 자리가 곧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 속에 인간으로서 함께 살아요. 우리가 사랑을 잘 나눠야죠.”

● 평소 마음에 담고 사는 표준이 궁금합니다.
“로제 수사가 주신 기도문에 ‘당신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람들과 함께 언제나 침묵과 용서의 정신 속에서 살게 하소서.’ 하는 구절이 있어요. 그 기쁨, 그 단순 소박함, 그 자비… 우리의 만남에서부터 모든 걸 다 주님에게 맡긴 그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늘 생각해요.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살면 돼요. 산다는 건, 부활이죠. 떼제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부활절이에요.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고, 부활 없는 십자가는 의미 없어요. 죽음의 고통, 그 이면에는 죽음의 고통보다 더 강한 사랑이 있어서 살아계시는 거예요. 성탄만으로는 약해요. 성탄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면 부활은 ‘우리를 위해 사시는 하나님’이에요.”

●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을 전해주세요.
“참 행복… 참 행복은 남을 위해 사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는 떼제를 찾아오는 젊은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기도 해요.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삶, 참된 삶은 뭘 ‘얻기 위하여’가 아니라 뭘 ‘주기 위하여’ 사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