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 꽃밭에서
변덕과 진심 사이,
소나기가 내리다
취재. 노태형 편집인

1.
‘후두두두두둑….’
급하게 달려드는 소나기 소리. 허둥지둥 걸음이 빨라집니다. 급하게 찾은 낯선 처마 밑. 한동안 시간이 느려집니다. 앉았다 일어섰다 앉았다 일어섰다…. 굴러다니던 조바심이 멈춥니다. 주르륵 떨어지는 빗물에 무심코 손을 내밉니다. 괜히 어릴 적 기억이 스쳐 지나갑니다.
“할머니,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여자 아이가 하나 있었죠?”
“누구…? 아…, 너 기억하냐?”
“네. 가끔 생각날 때가 있어요. 꿈속 같기도 하고요.”
“그래, 그런 애가 하나 있었지. 저 건너편 이웃집 할머니 손녀 말이지?”
“네. 그… 딸 부잣집 아이 중 분명 제 또래가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기억하는구나, 그 아인 여섯 살도 못 되어 저 세상으로 떠났지.”
“그랬구나…!”
죽음이 흔하던 시절. 슬픔이 무언지도 모르던 어릴 적 기억들. 그게 마음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나 봅니다. 어느 소나기 내리는 날에 문득 달려 나오는 걸 보면, 말이죠. 또 소나기처럼 지나가려나요?

2.
오랜만에 비가 참 많이 내렸습니다.
마침 수국을 보러 가는 날에, 말이죠. 벼르고 별러 가는 길이기에 설렘도 커집니다. 한 송이 홀로 피어난 꽃도 아름답지만 한데 어우러진 수국은 마음마저 더욱 풍성하게 하죠.
비를 잔뜩 머금은 수국이 수줍음 많은 소녀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연초록, 연분홍, 연파랑…. 글쎄요, 어쩜 살짝 삐진 듯도 하고, 혹은 누구를 기다리듯 들떠있기도, 아니면 맘껏 좋아하지 못해 잔뜩 화가 난 걸까요. 
“수국의 꽃 색깔은 땅의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대요. 어쩜 꿈 많은 소녀 같지 않아요?”
수국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아이의 말이, 마치 자기 이야기를 되뇌듯 빗소리에 묻혀 흔들립니다. 그래서 얼마나 아름답나요. 수국의 꽃말인, ‘변덕’과 ‘진심’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비마저도 꽃밭을 떠나지 못해 가슴앓이 중인가 봐요.
“수국은 수많은 작은 꽃들이 모여 하나의 꽃을 완성해요. 한여름에 한 아름 안고 싶은 꽃인 것 같아요.”

3.
사랑앓이를 지나온 사람은 압니다.
이별이 얼마나 가슴 쓰린지. 애별리고(愛別離苦)…. 한 번쯤은 지나야 할 인생의 징검다리. 하지만 그 기억은 오래오래 옹이처럼 붙어 다니죠. 피해 가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순간들. 한 번 두 번 세 번…, 얼마나 가슴 아파했을까요? 그렇게 멍 자국은 많아지고, 세상살이도 깊어집니다. 살아가면서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너무 꼿꼿하게만 살지는 마시게요.
변덕스러워서 사랑스럽다는 말, 참 설레지 않나요? 그렇게 걸어가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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