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 배헌 선생

글. 박윤철

1980년 12월에 간행된 월간 <원광> 105호에는 ‘일제하의 교단사 내막’이라는 대담 기록이 실려 있다. 이 대담 기록 속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36년(원기 21) 2월에 소태산 대종사를 방문할 당시의 상황이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다.
안도산 선생과 소태산 대종사와의 만남에 대해 증언한 분은 그 당시 소태산 대종사의 비서 역할을 맡았던 승산 김형오 선진이다. 그리고 함께 대담을 나눈 분은 상산 박장식 종사, 붕산 황이천 선생, 사회는 범산 이공전 종사가 맡아 진행했다. 이 대담은 일제강점기 교단의 수난사에 대한 생생한 증언인 동시에, 소태산 대종사 휘하에 귀의했던 독립운동가 출신 선진님들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료이다. 따라서 당시 교단 내부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당연히 이 대담 내용은 1980년 당시에 월 3회 간행되고 있던 <원불교신문>에도 12월 6일자, 12월 16일자, 12월 26일자 등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도산 선생과 소태산 대종사가 어떤 경위로 익산총부에서 해후하게 되었는가는 이미 상세하게 소개한 바 있으나(<원광> 2018년 11월호 참조), 도산 선생을 소태산께 안내한 인물로 알려진 배헌(1896~1955)이라는 분에 대해서는 지면상 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번 호에서는 배헌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기로 한다. 배헌 선생은 과연 어떤 내력을 가진 분일까? 먼저 승산 김형오 선진의 증언을 인용한다.

그때(1936년-주) 이리에 배헌 씨라고 하는 이가 계셨는데 우리 원불교에 대단히 호감을 가지고 내왕을 하셨는데 안도산 선생님은 배헌 씨의 안내를 받아서 오시게 되었습니다. (중략) 동아일보 (이리)지국장 했어요. 그래서 매일신보 지국장 하던 이창태란 분과 배헌 씨가 안도산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구타원 법사님이 계시는 응접실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배헌 선생은 안도산 선생을 소태산께 안내한 인물이자 1936년 당시 동아일보 지국장을 했다는 것이 승산님의 증언이다. 이 증언은 과연 사실일까? 우리 회상의 입장에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배헌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로 한다.
배헌 선생은 1896년 4월 27일에 익산(당시 이리읍) 갈산동에서 태어났다. 18세 때인 1913년에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가장 최초로 설립한 군사학교로써 오늘날로 말하면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다. 배헌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1917년부터 1919년까지는 지령에 따라 길림성 북로군정서와의 연락업무를 비롯하여 군자금 모금, 노령(露領; 러시아령) 자유시로부터 무기구입 등의 특별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하여 지하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29세 때인 1924년에는 동아일보 이리주재 기자 겸 이리지국장으로 부임했다. 이듬해 2월에는 구기회(救飢會; 기근 구제회-주)를 설립하여 굶주리는 이재민 구호에 앞장섰으며, 같은 해 5월에는 제 1회 전북기자대회 준비위원이자 서기로 활동하였다. 전북기자대회 개최 소식은 <동아일보> 1925년 5월 26일자 3면에 ‘전북기자대회 양일간 대성황’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소개되고 있는데, 같은 날짜에 배헌 기자는 ‘익산에 수도원’이라는 제목으로 불법연구회를 소개하고 있다.
배헌 기자가 <동아일보> 1925년 5월 26일자에 ‘익산에 수도원’이라는 제목으로 불법연구회를 소개한 것은 1924년 6월 3일자 <시대일보>에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소식이 실린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교단에서는 그간 1928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세상의 풍진을 등지고 담호반의 이상적 생활’이라는 기사가 일제강점기 민족언론에 보도된 최초의 기사라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3년이나 앞선 1925년 5월에 이미 불법연구회는 배헌 기자를 통해 세상에 소개되었던 것이다. 물론 3년 뒤인 1928년 11월의 불법연구회 기사도 배헌 기자의 작품이었다. 이처럼 배헌 기자는 안도산 선생을 소태산께 안내하기 이전인 1925년부터 불법연구회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기사를 쓰고 있었다. 
배헌 선생은 ‘남다른’ 민족의식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그의 활동은 식민지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에 노출되고 있었다. 우선 그는 동아일보 이리지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27년 6월 28일에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 익산지회 창립을 알리는 격문을 배포한 혐의로 익산지회 간부 8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배헌 선생은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으며,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여 징역 6개월이 확정되어 1928년 2월까지 옥고를 치루게 된다. 그리고 1928년 4월 29일에는 전북 임실의 임실청년동맹회관에서 제4회 전북기자대회 사회자로서 대회를 주도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또 다시 체포되어 1개월 후에 불기소로 풀려나는 등 일상적으로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1928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에 등장하는 ‘세상의 풍진을 등지고 담호반의 이상적 생활’이라는 제목의 불법연구회 관련 기사는 남다른 민족의식의 소유자였던 배헌 선생 특유의 민족의식이 투영된 기사였음에 틀림없다. 왜냐면 해당 기사는 배헌 선생이 가장 치열하게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의 기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대담 기록 속의 증언을 주목해 보자.

범산: 그때 그러면 도산 선생을 직접 모시고 온 흥사단 계통의 사람은 없는가요?
승산: 배헌 씨지요. 그분 밖에 생각이 안 납니다.
범산: 배헌 씨는 민족사상이 농후한 분인가요?
승산: 농후하지요. 요시찰 인물이지요.
범산: 배헌 씨가 처음으로 동아일보에 담호반의 이상적 생활이란 제목으로 우리 불법연구회를 소개한 기자입니다.
 
위 내용을 보면, 배헌 선생은 민족사상이 농후하여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음이 확인된다.
필자는 지난 4월 12일 대전광역시에 자리하고 있는 국립 대전현충원을 찾았다. 애국지사 배헌 선생의 묘소를 찾아 참배를 하기 위함이었다. 선생의 묘는 입구에서도 한창을 걸어들어가는 애국지사묘역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애국지사 제 5묘역 제 56호) 동아일보 이리지국장을 마친 배헌 선생은 1931년부터 42년까지 이리읍(현 익산시) 의회 의원으로, 그리고 1948년 5월에는 제헌 국회의원으로 진보적인 정치운동에 매진했다. 그리고 1955년에 서거하였는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 받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즈넉한 묘역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묘비 전면에는 ‘애국지사 배헌의 묘’라고 새겨져 있었고, 후면과 측면에는 ‘1896년 4월 27일 전북 이리 출생, 신간회 창립 및 선포 격문에 일경에 체포,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역임, 1955년 3월 3일 전북 익산 서거, 1991년 군국훈장 애국장 추서, 길림성 북로군정서와의 연락임무 및 군자금 모집,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대중계몽과 항일투쟁활동’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필자는 그 비문에 ‘남 먼저 개벽종교 원불교의 앞날을 내다본 선구자’라는 문구가 새겨질 날을 꿈꾸며 묘역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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