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빠를 위로하는 시간

먼저 가신 만큼 제가 더 열심히 살게요.

글. 이위성 한겨레고등학교 3학년

편지라는 건 그 상대를 직접 만나지 않아도 내 할 말을 전달할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제가 직접 마주 뵙고 말할 수 없기에 오늘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에게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 엄마 아빠라고 불러 본 게 몇 년이 지난 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행복한 가정을 보낼 시간에 떠난 엄마와, 아들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를 함께하지 못하고 떠난 아빠를 미워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분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먼저 떠나신 엄마가 더 힘들어 하실 것 같아서 그분을 먼저 위로하려고 합니다. 근 16년이 지났습니다. 16년이면 지금 중3 후배들의 나이와 같습니다. 저는 16년 동안 엄마를 보고 싶다고 울었던 게 몇 번인지 셀 수가 없습니다.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하신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엄마가 항상 장사를 나갈 때 하시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열 밤만 자고 올게.  딱 열 밤만.” 그렇게 떠난 엄마를 저는 하룻밤 또 하룻밤, 그렇게 며칠 밤 내내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계속 기다리기만 한지 16년이 지났습니다.
몇 달 전 엄마 사진을 봤습니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본 사진이었는데 누군지 몰라봤습니다. 저는 참 이기적입니다. 돌아가신 엄마는 기억 속에 16년 전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데, 저는 이렇게 커버려 놓고 엄마를 탓했습니다. ‘왜! 내가 당신을 못 알아볼 만큼 일찍 갔느냐?’며 미워하기도 하다가 갑자기 ‘엄마도 이렇게 커버린 나를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를 미워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밉기도 하고, 나는 이기적인 아이라는 판단도 해보게 됐습니다. 하지만 제가 변해도 엄마라는 이름 아래에 절대 제가 엄마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뿐인 엄마는 변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뿐인 우리 아빠! 4년 전 이 좋은 나라에 와서 빛을 못보고 떠난 우리 아버지…. 먼저 죄송하고, 존경합니다. 북한에 있을 때 참 많이 혼났던 것 같습니다. 사랑의 매로 저를 키우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매가 참 부족했습니다. 더 맞았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나이가 열세 살, 초등학교 4학년을 준비 중이었죠. 아빠는 그때부터 매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매를 맞지 않는다는 즐거움보다는 매를 들지 않는 아빠가 더 무서웠습니다. 아빠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에 더 무서웠습니다. 아빠가 화가 났는지 슬픈지 몰라서 더 무서웠습니다. 그냥 맞을 때는 화나 보이니깐 죄송하다고 말만 하면 아빠 화를 풀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잘못을 해도 아빠가 때리지 않으시니 그때부터 아빠의 진짜 기분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저희 아빠는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돈이 없어 병실에서 일찍 퇴원하고 수술 한지 얼마 안 돼 택시 대신 지하철을 이용해 남서울터미널까지 가셔야 했습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힘들던 그때가 너무 싫고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때가 그립습니다. 아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먼저 가신 만큼 제가 더 열심히 살게요. 그리고 아빠의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그렇게 살아갈게요.
“엄마, 아빠! 너무 감사하고 이런 저를 낳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지만, 정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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