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서 문학성을 드높인
우언(寓言)·중언(重言)·치언(言) 

글. 김정탁

<장자>, 즉 장자서는 동아시아 사상에 있어 특기할만한 점이 있다. 장자서는 <논어>, <맹자>, <도덕경>, <순자> 등과 함께 동아시아 사상을 대표하는 최고 고전 중 하나이지만 문학서로선 단연 으뜸이란 평가를 받는다. 어떤 사상서도 <장자>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그 문학적 표현이 빼어나다. 대붕(大鵬)의 비상, 천뢰(天)·지뢰(地)·인뢰(人), 조삼모사(朝三暮四) 우화, 호접몽(胡蝶夢), 포정의 해우(解牛), 광접여(狂接如)의 노래, 우물 안 개구리 등 <장자>를 최고의 문학서로 빛내는데 기여한 내용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렇다면 장자서에 수준 높은 문학성이 뿌리내리게 된 이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그건 우언(寓言), 중언(重言), 치언(言)의 표현 방법을 수시로 동원한 결과로 본다. 이런 표현 방법이 장자서에 어느 정도로 많이 동원되었는가 하면 우언의 경우는 열 개 중 아홉일 정도이고, 중언의 경우는 열 개 중 일곱일 정도이고, 치언의 경우는 날마다 등장할 정도로 많다. 그렇다면 <장자>는 우언, 중언, 치언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우언(寓言)은 바깥의 말을 빌려 말하는 표현방식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식의 중매를 설 수 없는데 그건 아버지 아닌 사람이 자식을 칭찬하는 게 아버지가 칭찬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이 누군가의 자식을 칭찬하는 게 아버지보다 설득력을 지녀서이다. 이는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어서이다. 또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같으면 따르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반대한다. 나아가 자기와 생각이 같으면 옳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틀렸다고 여긴다. 그래서 생각이 다르거나, 다른 생각을 틀렸다고 여기는 사람을 설득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우언은 이런 경우 이들을 설득하는데 있어 매우 효과적이다. 그건 스스로에게 잘못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아니면 은근히 깨닫도록 만들어서이다.

중언(重言)은 옛날에 살았던 성인의 말씀에 무게를 얹어 전하는 표현방식인데 한마디로 논쟁을 끝내기 위한 목적이다. 그렇다면 누가 논쟁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어야 한다. 이런 어르신이 한마디를 하면 떠들썩했던 논쟁도 조용히 끝날 때가 많다. 물론 나이만 많다고 무조건 어르신이 되는 건 아니다. 어르신이라도 그분의 말이 사리와 본말에 맞지 않으면 논쟁을 끝내지 못한다. 또 어르신이라도 덕을 지니지 못하면 사람의 도리(人道)를 갖추지 못한 어르신이다. 사람의 도리를 갖추지 못하면 진인(陳人), 즉 시대에 뒤떨어져 쓸모없는 어르신이다. 그러니 중언에 말의 무게가 더해지려면 사리와 본말에 맞는 말을 해야 하고, 또 덕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옛말을 하더라도 전혀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치언은 천예(天倪), 즉 자연의 결로 조화를 이루면서 만연(曼衍), 즉 한없는 자연의 흐름에 시비를 맡겨 천수를 누리는 말이다. 한마디로 치언은 상대방의 의식 상태와 삶의 상황에 맞추어서 자연스레 표현하는 것으로서 저절로 자신의 흐름을 찾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천예니 만연이니 하는 개념은 언뜻 이해되지 않으므로 이 개념들이 처음 등장했던 내편 제물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제물론에 따르면 “화성(化聲), 즉 변화해 고정되지 않은 소리는 늘 시비가 뒤섞이기 마련이다. 시비가 뒤섞이지 않으려면 천예(天倪)로 조화를 이루고, 만연(曼衍)에 맡겨야 한다. 화성이라도 자연의 결로 조화를 이루고, 한없는 자연의 흐름에 맡기면 그나마 타고난 수명을 다할 수 있다.”로 설명하는데 이것 역시 이해하기 쉽지 않아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화성은 어찌해야 자연의 결로 조화를 이루면서 만연의 상태에 이를 수 있을까? 물론 이것도 쉽지 않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언어를 자연의 결에 따라 사용하는 방법을 권한다. 왜 그럴까? 예를 들어 옳음(是)이 정말로 옳으면 옳음과 그름(非)이 다르다는 게 더 이상 논쟁거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러함(然)이 정말로 그러하면 그러함과 그렇지 않음(不然)이 다르다는 게 더 이상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 이처럼 참으로 옳거나 참으로 그르면 굳이 언어를 동원해 옳고 그름을 가릴 필요가 없다. 참으로 옳거나 참으로 그른 건 이미 언어를 초월하고 있어서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로 어설프게 시비를 논하지 않는다면 세상만물은 모두 같게 마련이다.

실제로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세상 만물은 모두 같다. 그래서 장자는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세상 만물이 같은 걸 두고 세상 만물이 같지 않다고 말로 표현하는 건 세상 만물이 같은데도 같지 않다고 억지로 말하는 일이다. 그래서 장자는 무언(無言)으로 말하라고 우리에게 주문한다. 이는 말을 하더라도 시비를 가려서, 즉 옳고 그름으로 가려서 말하지 않는 일이다. 말을 하되 시비를 가려서 말하지 않으면 평생 말을 해도 말한 게 아니지만, 말하지 않았는데 시비가 생겨나면 평생 말하지 않아도 말하지 않은 게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성을 어떻게 자연의 결로 조화를 이루어 만연의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치언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언’은 치언을 사용해야 하는 근거를 찾기 위해 사물에 이름이 어떻게 정해지는지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우리는 사물의 이름을 두고 괜찮다고 여기니까 괜찮고(可), 괜찮지 않다고 여기니까 괜찮지 않다(不). 마찬가지로 사물의 이름을 두고 그렇다고 여기니까 그렇고(然), 그렇지 않다고 여기니까 그렇지 않다(不). 이는 내편 제물론에 똑같이 등장한 표현을 여기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이름이 괜찮은 것과 괜찮지 않은 것의 구분은 실제로 그런 게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의 판단에 따른 결과이다. 또 사물의 이름이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도 실제로 그런 게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의 판단에 따른 결과이다. 

또 어째서 사물의 이름이 그러한가? 그러하니까 그렇다. 또 어째서 사물의 이름이 그러하지 않은가? 그러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다. 또 어째서 사물의 이름이 괜찮은가? 괜찮으니까 괜찮다. 또 어째서 사물의 이름이 괜찮지 않은가? 괜찮지 않으니까 괜찮지 않다. 이처럼 사물의 이름은 본디 그런 바 있고, 또 본디 괜찮은 바 있다. 또 사물의 이름은 본디 그렇지 않은 바 없고, 또 본디 괜찮지 않은 바 없다. 이 역시 내편 제물론에 똑같이 등장한 표현을 여기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다니다 보니까 길(道)이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다보니까 사물(物)의 이름도 저절로 생겨났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를 인시인비(因是因非), 옳음으로 인해 그름이, 또 그름으로 인해 옳음이 생겨나는 원리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기의=기표’가 아니라 ‘기의≒기표 관계’를 구현하는 작업에 해당한다. 이것이 글이 개념적으로 정확하고, 문법적으로 맞고, 논리적으로 정연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표현방법을 즐겨 사용하는 대표적인 그룹이 혜시로 대표되는 명가(名家)이다. 이에 반해 장자는 정확한 개념, 맞는 문법, 정연한 논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어도 의미가 통하는 표현방법으로서 치언을 선정한다. 따라서 치언은 개념적으로 정확할 필요가 없고, 문법적으로 맞을 필요가 없고, 논리적으로 정연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의 가슴에 필이 꽂히게끔 의미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치언(言)은 장자의 글에 수시로 나오는데, 만약 자연의 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어째서 그토록 오래갈 수 있겠냐고 장자는 우리에게 반문한다. 만물은 모두 씨가 있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지만 처음과 끝이 마치 고리와 같아 그 순서를 알 수 없다. 그러니 어느 게 처음인지, 또 어느 게 끝인지 알 수 없다. 이를 천균(天均), 즉 자연의 고른 균형이라고 말한다. 천균에 머무는 건 천예(天倪), 즉 자연의 결에 따르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세상만사도 어느 게 옳은 거고, 어느 게 그른 건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말로 시비를 가리지 않는 게 천균에 머물면서 자연의 결을 따르는 일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장자는 우언, 중언, 치언 중에서 치언을 가장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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