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연표에 드러난 공백 ①

글. 이정재

필자는 그간 교단사에 전하는 구사일화에 대한 해설을 이어왔다. 그중 마지막의 처사일화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한 분석은 매우 복잡하여 더 검토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소태산의 연표에 대한 검토를 잠시 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의 집필에 대한 개괄과 함께, 더 다루어야 할 부분과 핵심이 어느 곳에 있는가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
아래의 연표는 박용덕 교무가 작성한 <소태산 대종사 연표> 중 대각까지만을 요약해놓은 것이다. 연표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기록의 공백에 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소태산 대종사 연표>
11~15세; 산상기도 외 기록 전무
15세; 결혼
16세; 1월 처가 인사 차 고소설에 감명, 구사고행 시작(네 개의 관련 일화; 거지(도사) 초청, 하나님 시험, 부처 시험, 처사 시험)
17~18세; 기록 전무
19세; 1월 23일 장녀 출생(곤례)
20세(1910년); 11월 30일 부친사망
21세; 바랭이 만남, 귀영바위로 거처 옮김, 6~10월 탈이파시 부채 상환
22세; 구사 중지,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근심의 나날
23세; 노루목 이사
24세; 연화봉 수행(3~6월)
25세; 강변 입정, 8월 15일 장남 출생(길진)
26세; 4월 28일 대각

연표에 보이는 자료의 공백기는 크게 세 시기다. 제1공백기는 11~15세, 제2공백기는 16~19세 그리고 제3공백기는 21~25세로 각각 5년, 4년, 5년 총 14년의 기간이다. 구도역정기에 14년의 공백기란 매우 긴 기간이다. 물론 중간중간 일부의 기록이 있고, 제3기에는 연화봉 수행이나 입정상 등이 끼어있어 전무한 것은 아니나, 한 구도자의 일관성 있는 구도역정기를 구축하기에는 대단히 미흡한 자료다. 필자는 그간 주로 공백 2기에 대한 자료 메꿈의 글들을 집필하였다. 이를 근거로 그 대강을 조망해보고, 나아가 제3기의 공백을 메울 기획을 제시하기로 한다. 제3공백기의 자료가 전무하지 않은 점을 감안해 이를 둘로 나눌 여지는 있다. 즉 자료가 있는 기간과 그렇지 않은 기간으로 말이다. 그 기준은 24세 연화봉 수행이 된다. 그 전후 각각 3년과 2년이 된다.

11~15세 시 산상기도에 대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때는 나이가 어렸고 서당에 다니며 열심히 수학을 하는 기간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중학교를 마치는 단계다. 마을 내에 주로 머물며 수학을 하던 기간이다. 구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진섭에게 마을에서 얻은 지식은 기도를 올리는 일이었다. 삼밭재를 오르내리며 기도하기 전에는 큰골의 당나무 아래에서 기도를 드리곤 했다. 이 큰골 당나무는 길룡리의 여인네들이 집안의 대소사를 비는 기도터이기도 했다. 진섭은 이런 모습을 보고 어른들을 따라 산신을 만나기 위한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물론 서당에서 배운 유교사상도 훗날 그의 사유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유학은 지극히 규범적인 것이어서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없었고, 그의 구도적 열망을 채워줄 수도 없었다.
이외에 진섭이 마을의 민간신앙과 관련한 지식을 습득한 내용은 더 많이 있을 것이나 이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이와 관련된 것을 민속학은 민속신앙으로 묶고 그 아래에 가정신앙, 마을신앙, 점복신앙, 무속신앙, 풍수신앙 등으로 나누고 있다. 이외에도 그가 접한 민속은 마을에 남아있던 민속신앙과 관련된 많은 민속놀이와 민속축제 및 민속문학 등에 관한 것들이 된다. 당시 길룡리에는 이런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전하던 시기다. 당연히 마을을 관장하던 당골네가 있었고, 그가 하던 일이 무엇인지도 진섭은 예리하게 간파하였을 것이다. 조선 후기까지 전하던 전통문화를 듬뿍 수용하며 진섭은 그의 학습기를 보냈던 것이다.

당시 시골의 분위기를 긍정적인 측면으로 볼 필요가 있다. 당시는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던 시기다. 못살고 힘들어도 서로 돕고 이해하며 함께하는 정신이 살아있던 시기였다. 울타리 없이 어느 집안에 숟가락이 몇 개가 있는지 속속들이 알았고, 남의 딱한 사정을 헤아려주고 너그러이 이해하는 순수하고, 도둑이 없는 평화를 지향한 공동체 사회였던 것이다. 오늘날, 당시의 공동체 문화가 소실되면서 그에 대한 향수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다. 사회가 개벽한 시점에 다른 방식의 공동체가 요구됨은 당연하나, 불법연구회 시기 신앙공동체의 전범을 엿보게 하는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진섭의 학습기에 그는 밖으로 출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른을 따라 나선 명절이나 집안의 행사에 다니던 주변의 몇몇 곳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자의적으로 출타를 했던 기록은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그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6세부터 18세 말까지의 행적은 다르다. 19세 때도 부인이 딸을 출산한 내용 이외의 것이 전혀 없으니, 이때까지를 포함시키면 4년간의 큰 공백이 생긴다. 요즘으로 치면 이 시기는 고등학생~대학 초년생의 시절이다. 구도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진섭이 가장 왕성한 사유를 할 수 있는 시기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며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를 할 수 있던 단계였으며, 그를 위해 스스로 밖으로 출타를 할 수도 있던 시기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기록할만한 사실이 전무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과연 왜 이런 공백이 생겼는가에 대한 정황은 뒤로 미루고, 이 기간을 채울 수 있는 자료를 찾는 데까지 찾아보기로 한다.

그것은 전해오는 네 종의 일화에 대한 것이다. 위의 표 16세 시기에 표시한 네 개의 일화(거지(도사) 초청, 하나님 시험, 부처 시험, 처사 시험)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이미 상세한 추적을 한바 있다. 이들 일화는 꾸며낸 픽션이 아니라 처화가 몸소 겪었던 사실을 근거로 작성한 것들이었다. 여기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화 이상의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고, 기록 공백의 시기를 그나마 채울 수 있다는 위안을 주는 요소였다. 이 시기는 기존의 종교와 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사유와 섭렵의 시기였다. 또 이 점은 처화의 구도적 열정에도 걸맞는다. 

이런 노력과 시도는 그럼에도 그의 왕성하고 완벽한 구도열에 매우 미흡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사는 이 이외의 기록을 적지 않았다. 마지막 처사 시험 이후 구사에 실의하여 그때부터 독공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교사에서의 구도에 관한 내용 전부다. 구도에 열중했던 처화는 그러나 그 이상의 노력을 더 경주하였을 것이다. 그냥 실의에 빠져있지만은 아니했을 것이다. 그가 선운사와 연화봉 수행을 한 배경에는 어떤 배경이 있었음을 간파해야 한다. 수행의 또 다른 방법에 대한 지식이 더한 내력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동학난에 이어 참동학을 내세운 강증산의 출현은 당시 도꾼들에게는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처화와 강증산과의 만남이나 관련되었다는 내용은 전무하지는 않으나 매우 희박하다. 그것으로 둘의 상관성을 증명할 수 있는지는 추후의 일이다. 그러나 처화의 입장에서 불타는 구도열에 대한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대상으로 강증산을 고려할 수 있다는 추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처화는 당시 결혼도 하고 이미 장성하였고 체구도 건장하여 고향을 떠나 구도의 갈증을 채워줄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부모님의 경제적 정신적 지원과 결혼 후 가정의 안정성 등도 출타하여 구도를 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이 마련된 기간이었다. 구도의 큰 몫을 담당하였던 시기였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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