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른, 할아버지에게

글. 최희원

학교에서 경영이니 회계니 하는 것들을 배우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답답해 갑자기 꿈을 찾겠다고 나선 적이 있다. 좋아하는 게 뭔지, 하고 싶은 게 뭔지 잘 몰랐던 때였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둬야겠다는 것이었는데, 막상 자퇴를 하려니 덜컥 겁이 났다.
그 길로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왜인지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에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저 학교 그만두려고요.” 꽤 긴 정적이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속으로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려는 건지, 그만두고 난 다음에는 무얼 할 건지…. 나까지 속일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에게 이유를 물어봐 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딱 한 마디 “괜찮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깊고 분명한 눈빛이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괜찮아, 설령 실패를 하게 된다고 해도 말이야.’ 마치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안심했고 확신했다.
그 눈빛은 이후에도 계속 나를 지켜주었다. 가끔 어떤 난관에 부딪혀 멈추고 싶을 때마다 그 순간을 생각했고, 그렇게 나는 차근차근 옳은 길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원하던 꿈을 하나쯤 이루게 되었을 때, 나는 할아버지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 그때를 떠올리며 “어떻게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었냐?”고 묻는 나에게 할아버지는 “네가 잘 해낼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라고 대답하였다.
‘아, 당연히 알고 계셨나요.’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내가 나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온전히 믿어주고 그저 묵묵히 지켜봐주는 나의 어른,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란 걸. 지금도 나는 그 든든했던 눈빛으로 힘을 내 걷고 있다.
내가 조금 느려도 기다려 주던, 나의 모든 것이 괜찮던, 언제고 기댈 수 있는 믿는 구석이 되어준 내 할아버지. 지금은 나도 조금 어른이 되어 당신의 믿는 구석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든든하게 곁을 지켜줄 자신이 있는데, 이제는 당신이 세상에 없다. 늘 그렇듯 사랑받은 사람은 사랑한 사람보다 한 걸음 느리다.
‘언젠가 당신이 안 계신 세상에서 살아갈 수도 있다는 걸 몰랐어요. 하늘에서도 내내 저를 믿고 지켜봐 주실 걸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보고 싶네요. 감사하고 또 사랑합니다.’

서성거림의 시간

글. 성소희

출근 전, 햇살이 무척 좋았던지라 며칠 전 사 놓았던 봄옷을 기분 좋게 걸쳐 입었더니 엄마가 현관에서 한사코 만류했다.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옷차림이야.”
하지만 어벙한 겨울옷은 그날따라 유난히 입고 싶지 않았다. 결국 지각을 핑계 삼아 엄마를 밀어내고 출근길 지하철을 탔다. 역시나 햇살만 좋았지 밖에는 매서운 바람이 불었고, 바람은 얇은 옷 사이를 이리저리 뚫고 들어왔다. 퇴근할 때가 되자 몸에서 미열이 느껴졌다. 오들오들 떨며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데 설상가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 개시한 봄옷 위로 빗방울들이 떨어져 옷의 색이 점점 짙어지던 찰나, 갑자기 머리 위로 우산 하나가 드리워졌다. 옆을 보니 여자분이 씩 웃고 계셨다. 거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묻자, 나와는 정반대 방향을 말씀하셨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뛰어 가보겠다고 했지만, 그분은 길모퉁이에 있는 편의점까지 같이 가주겠다며 멀찍이 있는 편의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많이 걸으면 좋지요. 운동 중이었거든요.” 나는 물었다. “이런 날에요?”
걷는 걸 좋아하신다는 여자분의 한쪽 어깨가 젖어 있는 게 눈에 보였다. 편의점에 도착해 따듯한 음료수를 사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렸다. 여자분은 다시 또 씩 웃으며 괜찮다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보란 듯이 감기에 걸렸고, 며칠 동안 기침과 열로 약을 달고 살았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쯤엔 약 기운에 취해 정신이 혼미했지만, 그 여자분을 다시 만나지 않을까 싶어 한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독한 감기에 기침은 점점 더 심해졌다. 옆 사람에게 피해가 될까봐 지하철 구석 통로 쪽에 섰다. 내가 계속 콜록거리자 한 아저씨가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눈치만 보던 나는 죄송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아저씨가 티슈와 일회용 마스크를 건넸다. 죄송함과 감사가 섞인 인사가 나왔다. 비 오는 날의 여성분부터 지하철에서 만난 아저씨까지 사람들에게 도움만 잔뜩 받은 한 주였다.
그날 여자분과 마찬가지로 한쪽 어깨만 살짝 젖어있던 봄옷을 보며 그동안 나의 서성거림에 대해 생각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면 서성거리다 끝내 다가가지 못했던 일들이 부지기수였다. ‘정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 도움이 필요한 걸까?’를 생각하다 보면 다른 누군가가 나 대신 도움을 주고 있거나, 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끝이나 있었다.
그 서성거렸던 시간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다가가는 시간으로 바꿔 나가고 싶다. 비 오는 날 쓱 들어왔던 여자분의 우산처럼, 길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어때요?”라고 묻지 마세요

글. 김혜진

새벽 2시 35분이다.
눈에 피로가 몰리지만, 이미 졸음은 달아났다. 오롯이 나를 위한 때다. TV 건강 프로그램에서는 밤 10시~12시 사이에 자야 호르몬이 분비되고 건강에 좋다고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달아난 잠은 도리가 없다. 다음날 피곤한 몸은 초콜릿으로 충전하면 그만이다.
나만의 시간이지만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새벽 2시쯤 잠자리에 든다고 하면, 주위 반응은 이렇다. “대단하다. 책 읽는구나?” 또는 “토익 준비해?” 등 자기계발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억지로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다보니, 자는 걸 포기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하고 싶은 걸 한다. 집에 쌓아둔 책 중 입맛이 당기는 것을 골라 몇 줄 읽고 배가 허해지면 생라면을 적당히 뽀개 수프를 고루 뿌려 먹는다.
또 쇼핑 어플을 매우 신중하게 본다. 마음에 드는 제품을 비교해 가며 본다. 같은 제품을 팔더라도 수많은 판매자가 있어 ‘좀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바로, 총 결제금액! 만족스러운 가격을 확인하고 결제가 끝나면 새벽 임무수행은 완벽히 해낸 것이다.
“아, 뿌듯하다. 드디어 끝냈다.” 하지만 왠지 모를 허무함과 씁쓸함이 남는다.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에는 ‘내’가 주가 되어 제품을 고르고 영화를 보고 책을 사고 음식을 먹었다. 약속이 있는 날은 상대방이 늦어도 느긋하게 기다리는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인터넷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혹은 친구에게 이게 좋은지, 나쁜지, 재밌는지, 맛있는지를 묻거나 댓글을 통해 확인한다. 약속 시간이 다가올 즈음이면 SNS로 상대방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묻고 별 이유 없이 휴대전화만 뒤적인다.
모든 게 넘치고 스피드를 추구하는 지금, 기다림의 여유를 갖는 것이 어려워졌다. 내 생각보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생각의 여유로움과 자유를 박탈당한 것 같다.
길을 지나다가 커피가 생각나면 검색을 하거나 “어디가 좋아? 거기 커피는 어때?”라고 지인에게 묻는 나를 발견한다. 저렴하고 좋은 걸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저 커피가 좋아서, 따스한 햇살과 공간이 좋은 곳에 머물렀으면 한다.
여전히 잠이 안 오는 불면의 밤.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간다. 내일은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검색하지 않고, 느낌적인 느낌으로 선택해봐야지.

싸바이디 라오스!

글. 설성엽

원불교교사회(회장 최성원)에서는 지난 1월에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라오스 협약학교 교육봉사 및 문화교류를 다녀왔다. 우리는 1년 전 겨울훈련에서 해외봉사활동을 기획하며 라오스 청소년 교육현장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삼동인터내셔널과 MOU를 체결하고 이번 방문으로 그것을 현실화했다.
또한 내가 근무하고 있는 원광정보예술고는 라오스 시엥쾅 인근에 위치한 싸일롬, 롱뷰 학교와 협약을 맺고 매년 후원을 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특별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우리 일행의 첫 일정인 라오스교당 방문은 라오스 현지 교화와 학교사업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계시는 김명덕 교무님의 따뜻한 맞이와 기도로 시작됐다. 교당에서 손수 준비해주신 맛있는 식사는 평생 잊지 못할 감사함이었다.
라오스 현지 모습은 우리나라의 1970년도 정도 모습이었다. 40대 중반인 나에게도 느껴지는 모든 것이 너무 열악했고, 특히 도로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 장시간 미니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산골 고지대의 반타학교 학생들은, 사진으로 밖에 보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6.25전쟁 직후의 수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소의 배설물을 말려 땔감으로 사용하고, 학교는 필요한 기본적인 예체능·외국어 교육 등의 모든 것이 접근하기 힘든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무안을 주듯, 학생들의 표정은 그날의 푸르고 청아한 하늘처럼 너무나 밝고 예쁜 것이 아닌가!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경건함과 고마움, 그 삶 속에서의 아이들의 행복지수는 어느 곳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조금 더 그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저절로 생각하게 했다.
우리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는 예쁜 모습과 자체적으로 전통공연을 준비해 정성을 다해준 학생들에게 고마워, 나 또한 답가를 연주했다. 이어 조문주 선생님의 탈춤공연 등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지면서 교사회에서는 준비한 후원금과 물품을 학교에 전달했다. 라오스의 교육시설 방문이 처음이라 많이 부족했다는 마음이 들었고, 앞으로 나눔의 실천을 더욱더 많은 도반들과 함께할 것을 다짐했다.
그 아름다움 속의 라오스는 과거의 전쟁에 대한 상처가 남아있고, 아직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부족한 곳이다. 그럼에도 그곳 아이들의 맑은 하늘 웃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다. 천천히 가볍게 살아도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에 나의 삶을 돌아보며, 동시에 우리만을 위한 풍족하고도 넘치는 삶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누고 살핌이 ‘선택’이 아니라 ‘당연’해 지는 것, 이웃이란, 지구촌 어디에라도 닿아있는 존재이어야 함을 느낀 소중한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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