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처사시험하기’의
원형 재구 ①
글. 이정재

앞서 살폈듯이 일화 처사시험하기는 어떤 실화에 바탕했고, 이에 각색이 가해진 이야기였음을 알아봤다. 일화는 원래 처화에게 있었던 일종의 의식(치병의식)에 관한 것이었고, 의례를 주도한 이는 처화의 부친이었다. 그러나 각색은 부친 대신 처화를 주인공으로 바꾸었고, 그 주인공은 처사의 술수를 징치하는 것으로 했다. 그 목적은 처화의 영특함이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각색은 어떤 주인공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행해짐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원형을 재구하는 일은 처사시험하기가 단순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처화의 구도 과정과 밀접한 상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밝혀냄으로 인해 어떤 구도의 과정을 겪었는가에 대한 좀 더 많은 지식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색된 일화를 근거로 본래 있었던 실화를 추정해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각색본을 근거하여 원본 이야기를 역으로 추정하는 과정에는 너무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용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진행될 수 있기도 하다.

처사일화는 명확한 시기가 정해져 있어 당대의 민속지식을 찾아 비교할 때 그 난이도의 정도가 좁아질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치밀히 들여다보면 그 일치도는 상당히 높아지고, 단 몇 가지로 특정할 수도 있다. 일화는 분명히 어떤 전통적 문화 기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굵직한 서사만을 기준으로 시작하는 것은 실화를 복원할 때 사용되는 유효한 방법이다.

이런 방식으로 보면 ‘처사시험하기’ 일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를 기준으로 합리적인 추론을 이어가기로 하자.
1. 부친이 처사를 초빙한다.
2. 처사가 의례를 진행한다.
3. 처사가 퇴장한다.

그런데 1의 초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목적과 절차가 있어야 한다. 아무런 근거없이 사람을 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화의 내용은 처사를 시험하고 ?아내는 것을 결론으로 하고 있다. 즉 일화의 내용만으로 볼 때 초빙의 목적은 ‘처사와 신장 부르기를 시험하기’였다. 그러나 이 논리는 일화에서만 가능하다. 그 어떤 사람도 실험의 대상이 되기 위해 초빙되지는 않는다. 엄숙한 의례를 집행하는 그 어떤 사제도 그런 의도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의례의 과정에서 비롯된 곡절이 있었고 그것이 주를 이룬 일화였다고 간주한다 해도 최초의 목적은 단순한 시험받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1의 초빙은 다음의 두 가지 경우로 정리된다.

1.1. 부친은 처사를 -아들에 의해- 시험되기 위해 초빙한다.
1.2. 부친은 처화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초빙한다.
일화는 1.1.의 서사를 선택해 진행을 하였다. 앞서 본바 원래 초빙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부친이 아들의 의도(처사시험)를 수락하여 초빙하였다고 볼 수도 있으나, 역시 무리한 추정이다. 그 누가 먼데 있는 고명한 법사를 단지 테스트하기 위해 초빙할 것을 수락할 수 있을까. 비상식적인 일이다. 백번 양보하여 아들의 절절한 구사의 일념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그랬다 할지라도 그 의도는 불순하고도 정당치 못한 것이 된다. 주인공의 유능함을 증명하는데 결격사유가 된다. 그것도 농우 한 두를 걸고 시험을 벌이는 담판의 형국이 되었으니 사기에 가까운 해석이 되기 때문에 결코 성립할 수 없는 설정이다.

1.2.처럼 치병을 위해 초빙하였을 것이란 목적이 자연스런 서사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누차 언급이 있었다. 굳이 이를 나누어 따지는 것은 논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함도 있다.
일화에서는 3의 퇴장이 월담으로 처리되었으나 이는 부친이 아닌 처화를 주인공으로 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그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처사를 징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치병의례의 경우 병의 치유는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대체로 제의가 끝난 후에도 꾸준한 상호 노력과 정성 및 다양한 처방이나 금기가 동반되는 것이 상례다. 3의 퇴장은 그래서 치병에 관한한 미완의 단계로 열어두어야 한다.

한편 일화는 처음의 목적 치병의뢰와 달리 처화에 의한 신장 부르기 성공 여부로 치닫고 있다. 그 결과는 또 처사의 실책으로 결론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3은 일단 그 가능성이 열려있는 서사다. 또 이를 인정하지 않아야 할 증거도 없다. 아무튼 이 경우의 서사는 처화와 처사의 대면과정이 들어가야만 성립할 수 있다. 즉 아래와 같은 서사가 된다.
1.2. 부친은 처화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초빙한다.
2. 처사와 처화가 대면한다.
3. 처사가 의례를 진행한다.
4. 처사가 퇴장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2와 4는 처화를 주인공으로 해야 하는 각색의 필수 과정이었다. 이 경우 2는 1과 대치되는 모순이 드러난다. 농우 한 두를 치르고 모셔온 주체는 부친 박성삼이다. 막대한 재산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진행한 절차는 오로지 부모의 간절함인 자식의 치유다. 그러나 일화에서는 그의 역할이 전무하여 서사의 균형이 깨졌다.

더구나 치병은 고사하고 아들이 나서서 초빙한 처사를 ?아낸 결과가 되었으니 부친으로서의 실망은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어떤 언급도 없다. 그럼에도 위의 서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닐 수 있어 하나의 서사로 상정하기로 한다.

이러한 무리한 진행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서사를 상정할 수 있다. 즉 처사의 퇴장을 월담이 아닌 정상적 퇴장으로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위의 2, 즉 처화의 대면과 주인공 변화 서사를 넣을 수 없다. 처화가 처사를 시험하기 위해 잔뜩 압박을 해놓았는데, 순조로운 퇴장으로 결판난다면 앞뒤의 논리가 맞지도 않을 뿐더러, 주인공 처화의 의욕적인 처사시험에도 위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일화가 가진 주인공 드러내기의 논지전개에도 모순이 된다. 그러므로 서사 2와 4의 월담 퇴장은 같이 묶여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각색의 가장 주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4는 뒤에서 더 살피기로 한다.

그래서 기본 서사는 1-3이 아니라 1-4의 네 개의 서사가 기본이다.
1의 경우 생략된 내용을 더 밀고 나아갈 수 있다. 즉 처사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무슨 원인과 목적이 있어야 한다. 앞서 살핀 바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으로 압축했다. 이때 병이란 구도과정에서 오는 방황과 처세의 실추 혹은 그에 따른 정신적 방황(정신증세) 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심한 정신적 증세는 오늘과 달리 대체로 신병 증세로 판정하기도 하였다.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을 경우 내림굿을 하여 무속의 길을 걷게 했던 것이 과거의 전통이었고,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처화가 이런 류의 굿을 하였을 가능성은 “무당을 불러 굿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서대원, <회보> 60호)는 선진의 기록을 볼 때 충분히 가능하나,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모셔온 처사는 적어도 동네사람이거나 근동에 있던 이는 아닌듯하다. ‘어떠한 처사 하나가 산중에 잇다는 말삼을 들으시고 곳 사람을 보내 초빙하엿더니’ 처럼 유명인을 수소문하였고, 그는 이미 영험하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일화는 그에게 ‘와서 의례를 할 수 있도록 초청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사실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보통은 환자의 보호자가 병증에 대해 먼저 상담을 한다. 환자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이가 부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처방에 대한 결정도 보호자가 한다. 즉 처사는 이미 환자의 증세나 정도에 대한 사전 지식을 얻은 상태다. 처방이 ‘사제의 예’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이 과정은 더욱 진지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림의 의식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부모는 환자 당사자와 깊은 대화를 해야한다. 환자가 그 결정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처사가 환자와 직접 대면하여 판단을 해야한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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