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창을 여려며
글. 정인신

밤사이 첫눈이 내렸습니다. 뜰 앞 소나무가 멋지게 눈꽃송이를 피워내는군요.
창밖에서 서성이던 찬바람이 대설을 지나며 깊은 겨울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포근하다고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찾아 바쁜 하루를 보냈습니다.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는 낙엽을 쓸어 모으고 밖에 있는 수도는 꽁꽁 싸매어 고무통을 씌우고 야외 화장실은 물을 잠그고 동파 단속을 했습니다.
법당과 생활관 난방유를 넣는데 보일러실 앞 돌틈 사이에 보랏빛 제비꽃이 피어있네요. “아! 제비꽃, 이렇게 추운날에 어떻게 꽃을 피운 거야.” 너무 작아서 쪼그리고 앉아 꽃을 바라보는 나에게 주유소 아저씨는 말합니다. “참 감성이 좋으시네요. 수도하며 사시니 그런가 봐요. 우리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무덤덤하게 일만 하고 살아요.”

나는 꽃을 보고 감동하고, 아저씨는 작은 풀꽃과 마주하는 내 모습을 보고 감동하는군요. 그는 조심조심 꽃을 피해 기름을 넣고 돌아갔습니다.
이른 봄부터 가지가지의 꽃들이 피어났던 꽃밭, 이제 모두 떠나간 길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제비꽃은 고운빛으로 겨울과 마주하는군요. 발길을 돌리며 문득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눈부시게 화려한 꽃보다도 어느 구석 소박하게 피어있는 풀꽃은 자세히 보아야만, 오래 보아야만 그 모습과 향기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도 좋은 환경에서 드러나게 큰일을 해내는 분들도 있지만, 어느 구석진 외딴곳에서 말없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출가자의 삶도 마찬가지겠지요. 매년 1월이면 찬바람 속 눈길을 걸어 새 임지로 길을 떠나는 교무님들! 그리고 새해의 창을 열며 새 일터로 길을 떠나는 모든 분들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어느덧 또 하나의 나이테를 감으며 새해의 창을 여는 일은 설렘도 있지만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숙연함이 있습니다.

차 한잔 마주하고 앉아 조용히 지난 일을 돌아보니 바쁘게 허둥대며 살아온 날들이 많군요. 마음 한 켠에 자리 잡은 답답함과 아픔도 보입니다. 삶이란 늘 즐겁고 행복하기만을 바랄 수는 없지만 순간순간 다 비워내지 못한 잔재들은 무엇 때문일까?
어느 수행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이든 너무 집중해서 보지 말고, 억제해서 보지 말고, 만들어서 보지 말고, 억눌러서 보지 말라. 관찰하는 마음으로 알아차려라.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일어나야 할 것이 있다면 다 일어나는 것이니 일어나는 현상에 매달려 고통스럽게 만들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뜻이겠지요. 견해가 바르면 그일 그일이 공부의 기회가 되고 찬스가 되어 새롭게 경험되어지는 앎의 지혜가 쌓이겠지요.
사람마다 한 가정을 이루어가는 데는 가지가지의 사연이 있습니다. 교당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교도님은 연세가 80이 넘었지만 아직 결혼하지 않은 60이 넘은 아들 걱정을 달고 살아오셨습니다. 아들이 일터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밥은 먹었는지 잠은 어디서 자는지 무슨 사고는 없는지 종일 전화를 기다리며 불안해하셨습니다. 몸이 더 쪼그라들고 얼굴도 어둡고 날마다 고통스러운 날이었습니다.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나, 어떻게 저 근심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 바라보았는데 매일 올리는 천일기도에 참여하여 법문을 받들고 법동지들과 서로의 공부담을 나누는 과정에서 어느 날부터인가 얼굴이 밝아지고 걱정이 감사로 바뀌며 근심걱정이 떠나버렸습니다. 다음 생에는 교무님이 되고 싶다는 서원을 세우니 큰 박수를 보내며 그 서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작은 풀꽃 한 송이가 돌틈 사이에 피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곱게 스스로의 향기를 피워 내듯, 먼 과거로부터 누적되어온 아픔과 관념을 놓고 억눌리지 않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렇게 평온함이 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새해엔 어떤 겉치레가 필요 없는 나다운 삶을 살아보고자 합니다. 많이 웃고 작은 것에도 감동할 수 있는 순수함으로 내가 머무는 그 자리가 꽃바다가 되기를 염원하며 새해의 창을 열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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