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목사
교조의 가르침이
길이고 이로움이다

군대에서 뇌막염 진단을 받고 한 달 가까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후유증으로 말을 잘 못하게 되었고, 이내 절망이 찾아왔다. 암담했다. 앞으로 살아갈 걱정은 태산 같았다. 스스로의 신세가 하도 처량해 길을 가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눈물을 닦는 게 창피해서 고개를 뒤로 젖혔더니 하늘이 보이는 거죠. 그러자 저도 모르게 기도가 나오더군요.”
‘어부인 베드로에게 직접 찾아가 제자로 삼았던 예수님께서 왜 저에게는 안 찾아오십니까? 왜 나는 못 본 척 하십니까? 하나님도 사람을 차별하십니까? 하늘이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만약 베드로와 저를 차별하는 게 아니라면, 작은 일이라도 좋으니 당신 일을 좀 하고 싶습니다.’ 외치듯 내뱉은 간절함에 이내 대답이 들려왔다.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를 많이 기다렸다. 지금부터, 함께 가자.’
신춘문예에 등단한 동화작가이자 시인, 때론 영성가이자 농업인으로도 불리는 이현주 목사(영성과 밥의 집). 뭐라고 불려도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바라는 건 하나 있다. 그저 ‘사람’으로 통했으면 하는 것. “참 좋아요. ‘나 사람이야.’ 그러면 교무님과도 바로 통하잖아요? ‘난 남자야.’ 하면 여자와는 잘 통하지 않고, ‘나 한국 사람이야.’ 하면 다른 나라 사람과는 잘 통하지 않겠죠. 하지만 ‘나 사람이야.’ 하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다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어요.”

● 많이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제가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을 좀 모셨는데, 그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주신 말씀이 있어요. ‘먼저 누가 뭐라고 하면 겨우 대답만 해라. 묻지 않은 말을 하지 마라.’ 세월이 갈수록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는 생각을 해요. 오늘은 이렇게 오셔서 질문을 하시니까 대답을 해야겠지요.(웃음) 예수님도 그랬어요. ‘예 할 때 예 하고, 아니요 할 때 아니요 해라. 그 밖의 다른 말은 다 의미 없다.’고요. ‘예’ ‘아니요’는 먼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잖아요. 누가 말을 한 다음에 대답으로 할 말이죠.”
사람이 제대로 잘 늙으면 생각이나 마음이 젖먹이로 돌아간다고 표현한 이 목사. 젊을 땐 다 ‘내’가 하는 일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내가 잘난 줄 알았더니 아니네.’를 알면 저절로 수동적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주도하거나 먼저 나서는 게 아니라 그저 상대의 요청에 응해줄 뿐이라는 것. ‘묻지 않으면 답하지 마라.’는 말이나 ‘예 할 때 예 하고, 아니요 할 때 아니요 해라.’라는 말에 담긴 의미 역시 그게 아니겠냐며 웃어 보인다.

● 순천에는 어떻게 자리를 잡게 되셨나요?
“그건 설명할 말이 없어요 사실. 왜냐하면, 의도를 갖고 선택을 해서 온 게 아니니까요. 굳이 이야기 한다면 ‘살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허허허. 정말 근사한 표현이 있으면 좋겠는데, 진부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이끄셨다고 밖에요.”
낙동강 물은 충청도 어디쯤에서 시작해 김천, 대구를 지나 부산으로 흘러가는 코스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정작 흘러가는 물만이 자기가 어디로 나아갈지 알지 못할 뿐, 하늘에서 보면 그 경로가 환히 보인다. 이 목사 역시 그때그때 어디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이미 길은 정해져있다고 생각한다. 한정된 공간에서의 목회가 아닌, 다양한 지역에서 넓게 트인 활동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 역시 흐름을 따를 뿐이다. 누군가는 ‘왜 목회활동을 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교회에서든,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하늘이 준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사는 안에서는 모든 자리에서의 활동 중 목회 아님이 어디 있겠는가.

● 기독교 신앙 뿐 아니라, 동서양을 넘나들며 교류하고 공부하시는 점도 참 인상적입니다. “돌이켜보면, 젊은 나이에 예수님을 향해서 ‘나도 좀 만나주쇼.’ 하는 마음을 가졌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내가 만나겠다는 노력만으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깨달음도 그렇잖아요. 깨닫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으면 깨달음으로 갈 수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깨닫겠다는 그 마음 때문에 못 깨닫게 되고 그런단 말이죠. 만약 내가 예수와 만났다고 하면, 그건 그분이 나를 만나주는 거지 내가 그를 만나는 건 아니라는 말이에요. 간절한 마음으로 스승을 만나고 싶어 하며 살다보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분이 알고 그렇게 인도하신 것 같아요. ‘너, 나와 정말 만나고 싶으냐? 그러면 공자 한 번 만나봐라. 노자 한 번 만나봐라. 도움이 될 거다.’ 그래서 불경도 읽어보고, 원불교 교전도 참 많이 읽었어요. 만일 다른 사상서를 읽으면서 예수와 나 사이에 어떤 간격이 생겼다면 안 읽었겠죠. 여러 학문들을 접하면서 오히려 ‘아, 예수가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셨구나!’ 하는 게 더 선명해졌어요.”
불경이나 노자사상 등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접함으로써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배운 것과는 다른 각도와 관점으로 바라봄이 예수의 말씀을 더욱 제대로 이해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 목사다.

● 작업하신 여러 책 중에, 대담형식으로 쓴 책들이 눈에 띄던데요. 그러려면 충분한 묵상이 되어야 하고, 또 많은 교감도 필요하지 않나요?
“성경에 보면 ‘예수가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표현이 있어요. 하늘로 올라갔다는 건 곧 하늘이 되었다는 이야기잖아요. 하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으니 그분은 지금 ‘여기’에 늘 계시는 거예요. ‘여기’에 계시는데 소통이 안 되면 이상한 거죠. 그러니 늘 여쭤봐요. 질문은 내가 하지만 그 다음 답은 받아 적는 거죠. 그런 대화는 사실 모든 종교인이라면 해볼 만한 거잖아요? 시도를 잘 안 하니까 안 되죠. 성경을 읽다가 ‘이거 왜 이럴까?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머리로만 공상하는 게 아니라 여쭤봐요. ‘왜 그러셨어요? 그때 왜 그러셨어요?’ 하고요. 대답이 오거나 말거나.(웃음) 내 쪽에선 질문하는 게 내 일이니까 그렇게 할 뿐이고, 대답이 올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죠. 안 오면 안 오는 거고. 하지만 대답을 얻을 때가 더 많아요.”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던 예수의 일화가 이해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제가 살다보니까, 어울릴 사람이 있고 어울리지 않을 사람이 있던데, 선생님은 아무하고나 다 어울린 것 같습니다. 왜 죄인들과 어울리셔서 날 이렇게 곤란하게 하십니까? 저는 이 간격을 어떻게 줄여야 합니까?’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나는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들어서 아픈 영혼들과 함께 밥을 먹은 것뿐이다.’ 어떤 사람을 죄인이라고 보면 죄인이지만, 아프고 병든 사람이라고 보면 더 안아주고 보듬어줘야 할 사람이라는 답을 얻고 나니 삶이 달라졌다.

● 답을 얻고 싶어서 질문을 해도, 내 뜻만큼 안 구해져서 좌절할 때가 있잖아요?
“질문하는 것까진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거기까지고, 답은 내가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주어지는 거죠. 기다려야 해요. 내가 예상했던 답이 안 오면 실망한다? 그건 질문한 사람의 자격에 문제가 있어요. 자신을 다 비우고 ‘아, 어떤 답이 오든 그 대답에 순종하겠다.’ 하는 마음으로 질문해야죠. 말씀을 안 주시는 그것도, 사실은 답이에요. 처음엔 왜 답을 안주냐고 원망하겠지만, 소위 만남이라는 걸 경험하게 되면 그런 마음은 저절로 없어져요.”

● 종교들이 세상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도 많습니다.
“물이 산 위에서 아래로 흘러갈 때 ‘내가 이렇게 흘러가야 짐승도 먹고, 나무도 먹고 살지 않겠나.’ 하는 의도 없이, 그저 물이기에 흘러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종교인 역시 ‘내가 어떻게 하면 세상의 빛이 되고 보탬이 되고 기여할까.’ 그런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봐요. 원불교 신자라고 하면, 소태산 대종사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살기만 하면 돼요. 그랬을 때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뭔가를 받아먹고 그러는 거죠. 노자가 가르쳐 준 것도 그거예요. 무위(無爲), 뭘 하려고 하지 말아라. 종교인이라면 그 종교의 교조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살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세상에 이득이 되고 보탬이 될 거예요. 뭔가 특별히 노력하고 목적 삼을 필요가 없어요. 내 몸으로 교조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어야죠.”

● 종교나 종교인들이 사실 세상에 뭔가 도움을 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데,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이 좀 가벼워집니다. ‘그래, 난 나에게 주어진 역할만 잘할 뿐, 그러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할 뿐. 정말로 그래요. 노자가 그런 말을 했어요. ‘내가 덕을 끼친다고 하면 그건 덕이 아니다(爲德이면 非德이다).’ 어떤 사람이 그냥 살아요, 자기 몫의 삶을. 그런데 그게 남들에게 덕이 되는 거죠. ‘내가 이렇게 하면 누가 옆에서 봐주겠지, 나에게 멋있다고 칭찬해주겠지.’ 하면서 뛰어드는 사람은 수상하죠.(웃음) 종교가 세상에 기여하는 방법은 그건 각 종교가 자기 나름대로의 가르침을 따라 잘 사는 거예요. 그게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짐승도 먹고 나무도 먹게 하는 거예요.”

● 모든 종교가 본래 하나인 그 이치로 함께 잘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종교인이라면, 답은 간단해요. 자기 종교가 있는 사람은 그저 자기 종교의 교조님을 만나면 돼요. 그러면 다 없어져요. 석가모니는 불교 신자가 아니고, 예수는 기독교 크리스찬이 아니에요. 그분들은 이미 종교의 울을 벗어난 자유인이죠. 그러니까 그분들을 제대로 만나면 돼요. 그 세상에 가면 ‘어떤 옷을 입었냐.’ ‘어떤 종교 출신이냐.’ 하는 건 다 의미가 없어요. 그런 시대가 밝아오고 있어요.”

●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을 전해주세요.
“‘당신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걸 좀 아세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혹 알아도 그렇지 않다고 부정해요. 나에게 있는 걸 보세요, 얼마나 많은지. ‘당신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은 이미 다 갖춰져 있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던데, 동의해요. 그걸 알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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