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流花開
물 흐르고
꽃이 피다

1.
꽃이 핍니다.
겨울 추위에 잔뜩 엎드렸던 강물이 봄 햇살을 타고 찰찰 흐르자 강가 꽃들이 화들짝 놀라 깨어납니다.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 빈산에 사람 없어도 물은 흐르고 꽃이 피네.’ 소동파의 시가 세상을 깨운 건 아닐 테죠. 자연은 느릿느릿 흘러도 모든 생명에게 골고루 이로움을 나눠주지만, 사람의 일이란 고작 남의 것을 뺏는 것으로 자기의 이로움을 삼으려 합니다.
이는 어쩌면, 자연에게는 엄동설한을 견딘 설움이 있기에 모든 봄꽃을 피워내지만, 사람은 엄동설한을 피하는데 급급하다 보니 남의 꽃을 피우는데 인색한게 아닐까요. 삭풍이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밤새 윙윙 우는 소리가 한으로 맺힌 사람은 남의 울음에 귀를 기울일 줄 압니다. 겨울 눈보라에 길을 잃어본 사람에게는 따듯하게 자기를 태우는 연탄 하나마저도 그리 소중하겠죠.

2.
어쩌면 100여년도 더 전, 20세의 소태산은 엄동설한의 한 가운데 서서 엉엉 울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대는 암울하고, 길은 험난하고, 의문은 막막하니…. 아니, 그 의문마저 길을 잃어 ‘이 일을 어찌할꼬. 이 일을 어찌할꼬.’ 그 한 생각까지도 꽁꽁 얼어붙었겠죠. 겨울을 지내야 봄이 옵니다. “아따, 그 놈의 겨울 참 춥다. 올 봄은 참 따사하겠네.” 자연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은 이미 그 이치를 알고 있었던 거죠. 삶의 지혜, 말입니다. 소태산의 겨울도 모질게 추웠지만, 그래서 만생령을 살려내는 꽃을 피웠습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천도교 교령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작은 집이 잘 되니까 참 좋아요. 요즘 원불교를 보면 참 기분이 좋아요.”라던 그 분은, 천도교와 원불교를 큰 집과 작은 집에 비유했습니다. ‘내가 좀 못 살아도 동생이 잘 되니 얼마나 좋냐.’는 표현이시죠.
그런데 우려도 내놓았습니다. “우리 천도교는 일제강점기 시절, 워낙 많은 탄압과 박해를 받았기에 이제 웬만한 위기가 와도 들풀처럼 일어설 수 있는데, 원불교는 그런 고통의 시기가 없었기에 시련이 닥치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엄동설한을 지내지 않은 봄은 허상의 봄일 수도 있습니다. 낮도깨비들이 마치 요술방망이를 가진 냥 사람들을 현혹하는 시대, 말이죠.
3.
“넌 열심히 공부해서 꼭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른들의 부탁이 가슴의 울림으로 남았기에, 이런 가르침은 늘 삶의 짐으로 남았습니다. 어른이 된 어느 날, 그 짐을 아이에게도 대물림시킵니다.
“애야, 큰 꿈을 가져.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해야지.” 그런데 요즘 아이들의 생각은 다른가 봅니다. “왜~? 왜 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문득 말문이 막히죠. 그러다 어느 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왜? 왜 큰 사람이 되려 했는데~.’
큰 사람이 되어서 한다는 게 고작 남의 위에 군림하며 괴롭히기를 밥 먹듯  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 내 배 채우기에 급급하다면….

봄이 피어납니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의 색깔과 자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동참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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