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그리고 원불교②
- 대한민국 정신의 뿌리가 원불교 교리에 담겨있다 -

글. 여도언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나라이름이 ‘이’자로 시작하는 지역들이 눈에 들어온다. 중동의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이집트다. 시야를 조금 더 넓히면 이탈리아, 이디오피아가 보인다. 고대문명을 화려하게 꽃피웠던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는 그들의 선조가 일구었던 찬란한 고대문명의 혜택에 힘입어 지금도 해외관광객들의 발길을 불러들여 국민경제에 상당한 도움을 받고 있다.
태양을 의미하는 ‘이’자를 나라이름 첫머리에 둔 이유는 무엇이고, 누가 이렇게 한 것일까. 까마득한 옛날에 이들 나라 지배자들이 태양과 조상을 숭배하고 받드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정교하며 웅장한 신전과 피라미드 스핑크스는 태양과 조상을 받드는 사상을 유지 발전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에서 나왔다.

파미르고원에서 삶의 터전을 잡았던 배달민족은 추위와 강풍으로 인해 식량 확보가 만만찮은 일이었다. 선조들은 그래서 좀 더 따뜻하고 풍요로운 세계를 갈망했고, 누구랄 것도 없이 신천지를 찾아 뿔뿔이 흩어져 나섰다. 긴긴 여로 끝에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황하 등에 각각 정착해 기존의 부족들을 지배했다. 배달민족 후손들은 선조들이 고향에서 하던 대로 강 유역에서 태양을 숭배하고 조상을 경배하며 신을 찬양하는 문화를 창달했다.
이렇게 발달한 종교는 이름이 다르고, 교리가 제각각이지만 근본정신은 동일하다. 유교는 인간의 현실적 삶에 무게를 두고 윤리와 도덕을 가르친다. 불교는 생각, 감정, 오감의 찌꺼기를 지우는 심법을 닦는다. 선도는 현세보다 영생의 길을 찾아 몸을 수련한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서양의 선도라 불러도 크게 틀림이 없겠다. 이런 까닭으로 향교는 마을과 함께 있고, 사찰은 산 허리에 앉았고, 도관(道觀)은 산 정상에 주로 서있다. 이들 종교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유교는 하체, 불교는 가슴, 선도는 머리에 해당한다 하겠다.

원불교는 그러나 한 곳에 치우쳐있지 않고 종교들의 가르침을 통합한다. 기존 종교의 틀 위에 존재하며 제세이화와 홍익인간을 실천한다. 특히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세계로 인도하는 훈련법이 체계화되어 있다. 바야흐로 원불교가 이 세상에 대의를 발하여 인류를 구제하는 대업에 머지않아 크게 쓰이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높인다.
원불교는 변화의 거센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또 종합적으로 깨우쳐주면서 신앙과 진리에 대한 통일문제를 선명하게 설명한다. 인간세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방도를 찾아 설명하며, 인류에게 새로운 조화세계를 실현하려 한다. 세상의 파국, 종말을 주입시켜 두려움을 조장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힘이 들고, 힘써 일한 만큼 소득이 없어도 인류를 사랑하고 함께하는 기쁨, 그 은혜로움을 즐거이 감수한다.
역학, 천문, 지리, 유학에 통달했던 조선 중기 학자 남사고(南師古)는 ‘천하의 문명은 한반도에서 시작하며 전라도에서 천지의 도가 통하니 무극의 도’라고 역설했다.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폴 케네디는 “세계는 장차 동북아가 지배하게 된다. 그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 사회적 도덕성과 민족문화의 혼, 자유민주주의의 역량이 뛰어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한국인의 몸속에 인류의 모든 문명적 요소가 담겨있다. 이게 우리의 자원이다. 우리는 그만큼 세계 문명에 대한 이해도를 이미 체득하고 있다. 세계인의 소통과 화합이 우리 겨레, 그리고 원불교에 달려 있다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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