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혜명을 ‘새롭게’
유정엽 교무·득량교당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단이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교단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지만 그리고 사석에서는 소리 높여 떠들기도 하지만, 혹시 모를 불이익이 무서워 혹은 말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입을 다물고 마는 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리고 우리가 변화를 이끌어 낼 역량이 부족하기에 스승님의 법력에 기대어 교단의 혁신을 기원합니다. 그래서 새 종법사님께 바라는 개인적 소망을 적어봅니다.
‘경륜(經綸)’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선 종법사님들의 지혜와 경륜은 정책으로 실행되었고, 그 정책들에 힘입어 교단은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야 할 정책의 근거가 스승님의 ‘경륜’에 있기에 수정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변의 원칙을 실(實)이라 하고 상황에 따른 방편을 권(權)이라 합니다. 가령 ‘견성을 하지 못하면 항마위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이 실(實)이라면 ‘채워가게 만들자’는 경륜은 권(權)이 될 것 같습니다. 법위향상운동은 한때 교단의 성장과 교도의 공부심 향상을 위한 정책이었지만 이제는 다시 원칙에 근거한 법위사정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법위사정이나 교육기관 통폐합 등 많은 정책변화의 길목에서 ‘경륜’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경륜’이 소중한 것이지만 교법이나 진리보다 우선일 수는 없습니다. 교법과 진리에 맞게 경륜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신심(信心)과 공심(公心)’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신심과 공심을 갖춘 도인은 교단의 실질적인 저력입니다. 그러기에 교단은 인재를 키움에 있어 신심과 공심을 우선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심과 공심’이 지식과 지혜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직위의 인사에 있어 신심과 공심은 기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보다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은 그 직위에 어울리는 지식과 능력입니다. 교단은 후진들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조차 신심과 공심을 중심으로 평가하여, ‘과목과 전공과 실적’을 무시하고 선발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신심과 공심’이 정말 중요한 덕목이라기보다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핑계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더욱 문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점차 후진들이 능력과 지혜를 키우기보다 자신의 신심(信心)을 홍보하는 풍토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보다 신심과 공심으로 선택받으면 당연한 결과겠지요. ‘지식과 지혜를 키우는 신심과 공심’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이사병행(理事竝行)’의 전통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은연중 이판승과 사판승으로 나누어 사는 전통불교에 비해, ‘불법과 현실’을 하나로 보고 구현하는 이사병행의 전통은 초기부터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반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사(理事)가 나뉜 전통불교에서는 권승(勸僧)이 선승(禪僧)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습니다. 이사병행을 실천하는 우리교단의 어른들은 이판과 사판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교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때면 방외유객 몇 명이 끼어들 뿐 교단의 책임 있는 어른들은 외면하십니다. 언제부터인가 교단 내에서 성리법회 때 법문을 하실 스승님이 없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은 이사병행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일속에서 공부가 제대로 안 되어 교단의 공부가 묵어가고 성리법문을 해주실 어른이 적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일(事)과 공부(理)가 따로 있지 않음을 증명하여 이사병행의 전통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진리의 혜명’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여러 설문에서 출가·재가교도들은 원불교에 대해 느리고 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도 예전처럼 원불교에 기대를 가지거나 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세교단이라는 자부심이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100여 년 전 교단 초창기와는 달리 분명 우리의 지혜는 낡은 것으로 보이며 교단은 확장되지 못하고 고립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 신심과 공심은 아닐 것입니다. ‘일원의 진리’의 변하는 이치를 보아다 묵은 제도를 고치는 것은 우리 교법의 핵심이며 위대함입니다. 진리의 혜명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두 마음 먹지 말고… 무위이화로
정도상 소설가·북일교당

거두절미하고 “두 마음 먹지 말고 오직 무위이화로, 교단의 큰 지도인이 되시라.” 이것이 새로운 종법사에게 바라는 내 마음입니다.
첫 마음 혹은 한 마음을 우리는 흔히 초심이라고 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원래 ‘본성의 첫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말이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초심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사람을 군자라 했고, 초심과 다른 마음 즉 두 마음을 갖는 사람을 소인이라 했습니다. 우리 교단의 초심은 바로 소태산의 첫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태산이 똥을 먹으라고 했으면 똥을 먹어야지, 그 색깔과 모양이 비슷한 된장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된장을 찾는 마음은 소태산의 마음과 다른 마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즉, 두 마음을 갖게 된 것이죠. 된장은 방편인데, 지금 우리 교단에서는 방편이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방편을 본질로 삼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여성교역자의 정녀선서의 문제가 그러합니다. 소태산이 언제 어디서 정녀선서를 해야 한다고 했는지, 나는 <대종경> 어디에서도 그와 관련한 내용을 읽지 못하였습니다.
두 마음을 먹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 소태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소태산을 사진으로만 모시지 말고, 소태산의 깨달음으로 돌아가 ‘그 첫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소태산의 초심은 그 후에 생겨난 방편들이 많이 망가뜨렸습니다. 인구절벽의 시대,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익산 총부의 종법실에만 앉아 큰 스님 흉내, 큰 어른 흉내만 내고 있으면 그건 두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둘째, 부처를 젊게 해야 합니다. 소태산은 26세에 대각하여 부처가 되었습니다. 아주 젊은 부처였죠. 그러나 지금 우리 교단의 부처들은 속절없이 늙어만 가고 있습니다. 세속의 나이가 많아져 늙는 것이 아닙니다. 개벽하지 않고 방편을 본질로 삼아 버티고 있는 것을 두고 ‘늙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개벽은 완료형의 명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동사입니다. 소태산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개벽을 하지 않으면 부처마저도 그저 늙은이에 불과합니다. 마음이 늙으면 자꾸 두 마음을 먹게 됩니다.
셋째, 교단의 모든 역량을 청소년 교화에 쏟아야만 할 것입니다. 청소년 교화를 소홀히 하게 되면 원불교는 오래지 않아 소멸될 것입니다. 교당에 출석하는 교도들의 평균연령이 이미 초고령화에 접어들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현재의 방식으로 안이하게 청소년 교화를 한다면, 그것은 청소년 교화를 안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창의적인 청소년 교화와 그것을 위한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 무위이화해야 합니다. 무위(無爲)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로 삼은 것 이외의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소태산으로 돌아가 두 마음을 먹지 않고 오직 첫 마음만을 행하는 것이 무위입니다. 그리하여 원불교가 창의적으로 개벽하고 발전된 상태가 바로 ‘이화’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미움 받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미움 받을 용기를 갖지 못하면 그저 참모들에게 휘둘리기만 할 뿐입니다. 미움 받을 용기는 곧 개벽할 용기입니다. 개벽할 용기를 가져야 소태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을 노래합시다
양지현 교무·원광보건대학교교당

먼저 원불교 교단 2세기를 본격적으로 열어가게 될 새 종법사님과 새 지도부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러나 3대 말에 새롭게 결정하고 추진해야 할 많은 일들에 너무나도 많은 애를 쓰실 것 같아, 그 수고로움에 깊은 감사 인사를 먼저 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현재 청소년 교화를 담당하고 있어서인지 새 지도부에게 바라는 바 역시 청소년에 관한 생각들이 우선입니다. 원불교 2세기와 앞으로의 미래를 열어가야 할 이 땅의 많은 청소년들에게 우리 원불교는 큰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기대해봅니다. 그러기 위해선 교단에서 청소년 교화에 대한 투자가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 투자는 바로 청소년 교화연구소 설치, 그리고 청소년 교화센터 건립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단에는 많은 정책들이 세워지죠. 그 중 청소년 교화에도 정책이 세워지고 있지만, 실지로 청소년 교화는 하루가 다르게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동적 시대에 발맞춰 나가는 게 버겁기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청소년 교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현장에서 요구하는 목소리를 들어주고 그 목소리를 교화 프로그램으로 연결해 줄 수 있는 전문 연구소를 설립하고, 청소년 교화를 위한 전문 인력을 배치해 교화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 있는 교무들에게는 행정업무와 의식, 행사 등 각종 업무로 인해 1인당 많은 역할을 소화해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 교화연구소에서 현장의 청소년 담당 교역자들에게 다양한 교화프로그램 제시 및 그에 따른 교육을 시켜줘야 청소년 교화에 새로운 바람도 불고, 교단의 큰 숙제인 인재양성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지금 현재로서는 각 교당의 청소년 법회 참여 숫자가 갈수록 적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청소년 센터가 건립되어서, 기존의 딱딱한 법회 참여가 아닌 일반 학생들이 센터에서 인성을 함양하고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문화체험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자율적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공간은 누구나 쉽게 오갈 수 있는 장이 될 것입니다. 또한 다양한 동아리와 모임이 생성되어 그 속에서 대종사님의 교법이 오고 갈 수 있는 교화의 장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청소년교화는 알다시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콩나물시루에 물이 다 빠져나가도 콩은 점점 자라나듯, 청소년교화도 아낌없는 투자를 다 해야 원불교의 미래가 싹 틀 거라 생각됩니다.
요즘, 교단적으로 희망을 노래하기보다는 비관과 부정적인 시선이 팽배해지는 걸 한 번씩 듣게 됩니다. 하지만 대종사님의 교법에 대한 확신을 갖고 교법대로 정진 적공해 나아가고, 전 출가·재가교도의 공부심이 나날이 살아나 법풍이 불어서 모든 사람들이 대종사님의 법통제자가 되어가고,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혈심혈성으로 이 교단을 위해 정성을 다하신 선진님들의 뒤를 오롯하게 밟아 나아간다면, 모두가 희망을 노래하는 순간순간들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님은 다시 오신  대종사 박중빈
지종우 교도회장·동안양교당

내 코가 석자라 앞뒤 겨를이 없건마는 도미(道味)에 풍덩 잠겨있지만은 않음이 확실해서 당돌하게도 동시대 여타소속 종교의 국한을 벗어나 많은 도반님들께 누를 끼친다. 하물며 제하의 청원은 선출인 당사자(님)의 오랜 서원과 상충하거나 같지 않음이 너무도 당연하리라 장담키에, 한사람 재가 필부의 입장에서 감히 속맘을 탈고하고 압축해 축하의 예를 대신하여 메아리 없는 방울을 달고자 한다.
요지는 ‘실력’ (특히 <대종경> 경륜편 33장), 이 한 단어이다.
풀어서 그 하나, 종단은 주(主)가 정신(이치, 성리)이요 종(從)이 사업(일)이라 선후본말이 여여확고 해야 한다. 눈에 드러나는 사업(결과물)에 연연한다는 것, 아니 그렇게 보이는 것 자체가 안쓰럽다. 성적은 하늘이 준다. 재가는 용금이 적었을 때의 종단을 자랑스러워하며 잊지 않는다. 전무출신 제도가 있는 마당에 굳이 재가 역량 강점분야에 앞장서려 하는가. 하자보수가 난감하다. 나서지 않고 대중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진정으로 원만구족한 참 실력이다. 덩달아 화려장엄을 쫓다가 이래저래 볼썽사나운 집단이 바로 사이비라. 우리는 기성복은 별로로 여기며 간편하면서도 내게 맞는 옷을 좋아한다. 부처는 자비라지만 중생은 서글프다. 영육쌍전(靈肉雙全)은 거듭되는 과정이며 가난은 불편할 뿐. 우리가 화려해질까(그렇게 보일까 조차 두렵다. 참 행복의 소종래를 밝혀야 할 그 곳), 그 마르지 않는 샘물은 어디 내 맘속 뿐이런가. 새 종교의 심볼은 ‘○’이요 그 씨앗의 짱은 ‘님’이다.
또 하나, 이미 메신저 시대다. 스타 교무님이 뜨던 안 뜨던, 새로운 지도자는 재·출가 교화단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자리에서 프리처(preacher)요 메신저여야 한다. 그래야만 감옥이 바로 사랑방이 되지 않겠나. 다재다능도 이제는 한계점이 불분명해졌으니, 그 방향키와 돛대는 더더욱 여여확고 부동해야 한다. 누구나 멘토요 멘티의 시대다. 저마다의 단점이 강점으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는 그 바탕은 역시 ‘실력’이다. 이제는 매년 이 땅에서 만이라도 재가교도가 아니라 이웃 종단과 정치지도자들이 적어도 신년하례만큼은 먼저 챙기게끔 되어야 한다. 나아가 한 해의 덕목강령과 그 시대정신을 꿰뚫는 통찰력과 선지력을 주요 언론매체를 통해 매년 그리고 국가적(세계적) 중대사에 닥쳤을 때 즉각적으로 만방에 드러내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귀감이 되어 거울삼도록 해야 한다.
더 하나, 중생은 살아 있는 부처인데 제복을 입음으로서 죽어버리면 그 뒷감당은 어쩔 텐가. 너와 내가 없는 그 혼이 살아야 한다. 세세생생 공부의 근본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 마중물의 근원이 바로 ‘님’이다. 훈련법이 우리 법임에라 훈련 싫어하는 부처님들 기껍게 인도 유도할, 그래서 거듭나게 할 그 묘책도 바로 ‘실력’에서 비롯될 뿐이다. 재·출가 양쪽 다 누가 뭐래도 ‘님’은 새주세불이신 대종사의 진의와 정신에 가장 가까운 어쩌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화현하신, 아니 뛰어넘으신 부처임에 틀림이 없다. 못난 중생이 시간을 나누고 지장, 덕장, 용장을 가를 뿐. ‘님’은 분명 새로 오신 대종사 박중빈이다. (생각이) 젊은 교무님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내 눈은 삐었지만 님은 아실 테지! 다난흥방(多難興邦).

 

대 전환기의 교단을
이끌어주실 새 종법사님께
박화영 교무·부산울산교구사무국

얼마 전 마당에 심어진 연꽃을 보았습니다. 거친 잎으로 둘러싸여 꽁꽁 싸매진 꽃봉오리가 햇살에 따라 한 겹 한 겹 서서히 펼쳐지다, 종국엔 꽃술까지 전부 드러내며 아름다움을 뽐내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진흙 속에 피는 연꽃이기를 간절히 서원하여 이 자리에서 기쁘게 교역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에게 서원의 꽃봉오리를 활짝 피게 해 줄 따스한 햇살은 과연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진리와 스승님과 법과 회상이 되겠지요. 그중에서도 스승님을 통해 진리를 만나고, 스승님을 통해 법을 체받고, 스승님을 통해 회상관을 세울 수 있는 것이 맥을 대는 공부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새로이 추대되실 종법사님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큽니다.
수위단 후보가 발표되고 난 후 한동안 여기저기서 술렁였습니다. ‘큰 교당·총부기관 근무자가 아니면 수위단을 못 하는 거냐’고,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투표를 하느냐’고 매번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불평이 또 터져 나왔습니다.
종법사님! 우리 교단을 법으로 이끌어 갈 지도자를 뽑는 이 중차대한 일에 이름과 근무경력만으로 인지도 투표를 하는 현실을 언제까지 이어가야 할까요? 후보님들의 교리 해석을 가늠할 수 있는 설교라도 한 편, 개인의 공부 정도를 알 수 있는 심신작용처리건과 감각감상이라도 한두 편 정도는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객관적인 검증 자료를 토대로 우리교단에 속 깊은 공부인들이 너무도 많아 누구를 뽑아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수위단원 선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모시는 스승님이 많아 법열 넘치는 교단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종법사님! 교단 2세기에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각 계 각 층의 다양한 목소리가 들리시지요? 개벽의 상두소리가 들리시지요? 세상이 변함에 따라 시대가 요구하는 것도 많고, 출·재가 교도들이 바라는 것도 많아 어깨가 참으로 무거우시리라 짐작합니다. 그래도 저희는 대종사님의 제자들이니, 대종사님의 법통을 이어받으신 종법사님의 뜻이라면 사무여한의 정신으로 작정코 따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오니 종법사님! 어느 한편에 치우쳐 보이지 않는 파벌형성으로 상대심을 조장하는 소수인의 종법사가 아닌, ‘우리 모두’의 종법사가 되어주십시오. 지방 5, 6급지 교당에 근무하는 사람도 누구 하나 소외되었다는 기분 느끼지 않게, 기쁜 마음으로 교단에 협력할 수 있게 하나의 교단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교단에 전무출신 지원자 감소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출산율도 감소하고 청소년의 숫자도 감소하고 사회적으로 종교에 대한 수요도 적기에 어찌 보면 시대와 맞물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연예인 지망생은 넘쳐나고 있지요? 청소년들의 눈에는 연예인의 생활이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도님들의 눈에 비치는 교역자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일반 사회인들이 보는 교역자의 모습은 어떨까요? 간간이 측은한 시선으로 보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천금을 바라 출가하지 않았으니까요. 이 법 만나 대종사님의 교법을 전하는 일이 너무나 하고 싶어 출가 했으니까요. 전무출신의 도를 처음 듣고 제게 주어진 그 사명이 너무나 커서 몇 날 며칠을 설렘에 잠을 설쳤으니까요. 모든 교역자가 처음 출가할 때의 그 맘이 되살아나 매 순간 기쁘게 살아간다면, 어느 누가 봐도 그 삶이 좋아 보인다면, 서로 하겠다고 찾아오지 않을까요?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부탁일 것 같습니다. 교역자 한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살아날 수 있게 교단을 이끌어 주십시오. 초심으로 돌아가 환희심으로 교역생활에 임할 수 있도록 대종사님의 교법이 살아 있는 교단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 모두의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면, 교단도 교화도 세상도 살아나지 않을까요?
새 종법사님! 모두를 살려주실 새 종법사님! 온 맘 다해 환영합니다~!!


또 변화해야 하는 것 아닐까?
조경흠 청년교도·행아웃교화단

서울에 있는, 누구나 들으면 이름을 아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알 만한 회사를 다니고 있다. 소위 남들이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마음 한 켠은 언제나 불안하다. 부모님 세대처럼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이미 사라진 상태. 다들 마음 한 켠엔 현재 직장에서 퇴사를 꿈꾸거나, 다른 회사로 혹은 다른 직업을 준비하고 있다. 일을 할 수록 내가 무엇을 얻기보단 소모되고 있고, 이곳이 내 미래를 책임져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내 자신이 충만해 질 수 있는 것, 스스로 발전하고 힘이 되는 무언가를 찾고 있다. 작금의 청년들이 처한 현실이다.
한국 영화 중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요즈음 사회를 보면 그 말이 딱 맞다고 생각한다. 촛불혁명, #MeToo운동, 꼰대의 등장, 교수나 국회의원들의 논문 표절, 기득권자들의 갑질 등 예전에는 맞다고 받아 들여졌던 가치들이 지금은 잘못되고 틀린 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 교단에서 꾸준히 말하고 있는 친환경, 탈원전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산업의 변화, 최대 주52시간 근무환경, 꾸준한 최저임금 상승 등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고, 이 환경 속에서 이뤄가야 하는 청년들은 불안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이런 주제들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공감하고 싶어 한다.
바란다. 새 시대의 교단과 교당은 이런 고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대학생 교우회를 다니며 가장 좋았던 점이 이 부분이었다. 매번 회화로 법회가 진행되었지만 교무님과 우리는 교전을 펼치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이번 학기 계획에 대해 말해보고 학교생활에 고민이 있으면 회화 시간에 꺼내 놓아 다른 사람 이야기도 들어봤다. 내 고민에 대해서 공감해주는 이야기가 나올 때도 혹은 반대하는 이야기가 나올 때도 있었다. 교우들도 돌아가며 한마디, 교무님도 돌아가며 한마디, 개인적인 경험에 기대기도 하고 교법에 기대기도 했다. 회화를 한다고 해서 명확한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내 생각을 정리하고 생각할 거리를 늘려 갔다.
이런 법회 진행이 무리가 없었던 것은 교무님이 우리에게 해줄 이야기가 많아서이기도 했다. 나이가 있는 법사님이었지만 우리보다 EXO 멤버 이름을 많이 알고 계시고 뮤직비디오를 챙겨보셨다. 신문에서 읽고 교도님들께 보고 들은 경제 지식을 토대로 사회의 변화, 유망한 산업들을 이야기해주셨다. 나도 교환학생을 선택할 때 교무님께 선택지 중 몇 가지를 들고 가 여쭈었더니, 당시 국제적으로 경제 발전이 빠르고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하고 있는 나라인 터키를 추천해 주셨다.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 보석같은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교법뿐만 아니라 교도들이 현실에서 피부로 맞닿은 주제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마하시고 교법과 연결해보며 이야기를 나눠주셨다.
교법을 연마하고 내 마음을 닦는 것만큼, 변하는 바깥세상을 지켜보고 그에 맞게 공부하여 변해가는 것은 출·재가교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새 시대 새 종교라는 타이틀을 가진 우리 교단이지만 100년 전 대종사님이 뜻을 펼치신 때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또 많이 변했다. 우리가 가진 좋은 것들이 지금 세상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새로운 20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또 변화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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