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가 없는
마음으로 공부하자

보통사람들은 ‘생사가 있는 마음’을 주인 삼습니다. 하지만 생사가 있는 마음은 늘 변하는 것이라, 반드시 괴로움이 생깁니다. 누군가를 좋아하여 도움을 주었는데 그에 상응하는 보응이 오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괴롭고, 희사를 많이 했는데 그 희사를 몰라주면 그것 때문에 괴롭기도 합니다. ‘생사가 있는 마음’에 표준해서 살면 늘 어려움이 생깁니다.
속 깊은 마음공부를 하는 분들은 반드시 ‘생멸이 없는 마음’을 지키고 수호하는 데 정성을 들입니다. 생멸 없는 마음을 깨달아 거기에 공을 들일 줄 알아야 공부길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나이가 90이 되었어도 생멸 있는 마음으로 살면 진정한 수도인, 큰 수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유교에서는 ‘일취월장(日就月將)해야 된다.’고 합니다. 날로 더 좋아지고, 날로 능력이 생기는 것에 주(主)한다는 말이지요. 스스로 일취월장을 해야 합니다. 오늘도 해보고, 내일도 해보면서 반복하면 실력이 생깁니다. 글씨를 처음 배울 땐 형태가 우스운데, 계속 쓰다보면 달필이 됩니다. 원불교에 들어와 교리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뭘 잘 모르지만 계속 공을 들이다 보면 교리에 능해집니다.
텅 빈, 생멸이 없는 영원한 그 마음을 바탕삼아 공을 들이면 일취월장으로 인해서 생기는 애착이나 상(相)도 없앨 수 있습니다. (103. 08. 08 故 윤타원 최운주 정사 열반 법문)

과거, 현재, 미래에 한결같은 진리

우리는 늘 법신불 사은전에 고백하고 기도를 올립니다. 그 대상인 진리를 여러 가지 표현으로 나타내지만, 사실 법신불의 진리는 하나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깨달은 그 하나의 진리를 우리가 어떻게 본받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여,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진리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들어진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굴리는 염주에도 시작과 끝이 있고, 우리의 생명에도 생(生)이라는 시작과 사(死)라는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법신불 진리는 생멸 없이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먼 미래에도 있고, 혹여 지구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입니다.
그 불생불멸한 일원상 진리는 반드시 어떤 작용을 합니다. 그 어떤 작용을 ‘인과보응’이라고 합니다. 원인은 반드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결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인과보응의 진리라고 합니다.
일원상 서원문에서도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다.’고 하였습니다. 변하는 것으로 보면 늘 변하는 자리로 볼 수도 있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 변하지 않는 자리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그런 진리를 향해서 기도를 합니다. 동시에 그 진리를 본받기 위해 애를 씁시다. 본받고 닮아간다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불생불멸한 진리를 모시고 살 뿐만 아니라, 닮아가며 살아야 합니다. (103. 07. 21 예비 도무·덕무 훈련)

법식(法食)은
영혼의 먹거리

영혼은 뭘 먹고 살아야 할까요? 육신이 밥을 먹어 보전하는 것처럼, 영혼도 먹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영혼의 먹거리가 바로 ‘법식(法食)’입니다. 부처님 법문을 많이 봉독하고 많이 들으면 내 영혼에 살을 찌울 수 있습니다. 교당에 와서 교무님이 해주시는 법문을 듣고, 또 스스로 경전을 봉독하고 그러면 그때가 법식을 하는 것입니다. 법식을 많이 하면 내 영혼이 저절로 지혜로워집니다.
<대종경>을 봉독하면 대종사님을 만나게 되고, <정산종사법어>를 봉독하면 정산 종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부처님들과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지요. 법문을 많이 봉독하고 또 쓰기도 하다보면 ‘아, 이 법문이 참 좋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내 영혼에 살이 붙습니다.
시험성적이 잘 나오는 아이들은 항상 ‘오늘은 선생님이 무슨 말씀, 무슨 말씀을 했다.’고 딱 새겨놓는답니다. 법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무님이 법문을 하시면 ‘오늘은 이 말씀, 이 말씀을 하셨다.’ 하고 딱 머리에 새겨 놓고 잊어버릴 때쯤 다시 새기고 새기기를 반복하면 내 머릿속에 딱 들어가서 법문에 저절로 살이 찝니다.
법문을 사경하고, 그 법문의 줄거리를 정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실천해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모두 법문을 소화하는 과정입니다. 소화가 잘 되어야 진짜 내 것이 됩니다. 밥을 잘 소화시켜야 몸에 영양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법문을 봉독만하거나 사경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보고 직접 실천하면 법문이 내 영혼의 지혜로 바뀝니다. 법식을 잘 해야 합니다. (103. 07. 15 태릉교당 교도 접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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