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스무 살
한참 후 친구들을 통해 그 애도 내게 호감이 있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지만,
연락은 하지 않았다.

글. 원소영


막 대학에 입학했을 때다.
교양 수업에서 나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친구를 좋아했다. 매사에 당차고 발표를 잘하던 모습에 반해 주위를 맴돌았고, 조별 과제를 위해 같은 팀이 되어 친해졌다.
목석같던 나는 그 애를 알게 되면서 치마를 입기 시작했다. 아이라인을 그리고 틴트를 발랐다. 그러나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그 애는 날 놀리기만 할 뿐이었다. “웬 화장이냐. 누구 좋아하냐.” 그런 말들에 괜히 민망하여 밤마다 분노하며 화장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때 즈음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습관 하나가 생겼는데, 바로 그 애를 향해 쓴 메일을 나 자신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dear로 시작한 메일은 내 감정들을 나열한 두서없는 고백 편지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쓰는 횟수가 늘어났다. 새벽에 차마 보내지 못했던 “자니?”도 적었고, 사심으로 범벅되어있던 “네가 내 손을 잡는다면,” 따위의 말들도 있었다. 어쩔 땐 “우리의 입맞춤을 상상하곤 해.” 하는 민망한 가정들도 펼쳐졌다. 끝은 항상 “오늘도 좋아해.”로 마무리 짓곤 했다. 그렇게 내게 쓴 메일함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조별과제 발표 당일에 일이 터졌다. 발표를 맡았던 그 애가 PPT를 넣어둔 USB를 분실한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내 메일함에 PPT를 저장해뒀다고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무사히 발표를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에 손이 떨렸다. 그리고 내게 쓴 메일함을 클릭할 찰나에 ‘아차!’ 하는 생각이 스쳤다.
큰 강의실. 60명이 넘는 학생. 교수님. 넓은 스크린. 집중된 이목. 그리고 클릭 한 번과 동시에 펼쳐진 내 고백들. ‘dear’.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고, 가슴팍이 울렁거렸다. 무릎이 달달 떨렸으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마우스를 움직였지만 하필이면 잘못 클릭하여 PPT가 아닌 그 내용이 잠깐 공개됐다. 눈을 질끈 감은 채 PPT 파일을 열고 후다닥 자리로 돌아왔다. 어떻게 한 번도 안 해본 고백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자취를 감추듯 숨었다. 수업이 끝나고 그 애에게서 오는 연락도 받지 않았다. 한참 후 친구들을 통해 그 애도 내게 호감이 있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지만, 연락은 하지 않았다. 항상 알아주길 바랐던 감정인데 뭐가 두려웠던 걸까. 어쩌면 나는 ‘들키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용기를 내길’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제야 후회가 들었다. 기회가 왔을 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 쫓기듯 감정을 고백 ‘당했던’ 것이.
미숙했던 풋사랑은, 사라지고 싶은 마음과 함께 내가 정말 숨어버려서 끝이 났다. 사실 그때 일은 아직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그 후 나는 무슨 일이든 남이 알아차리기 전에 다가서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런 내 노력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과거에 숨어버렸던 나도 고개를 내밀 수 있지 않을까. 당당히 고백할 수 있을 내일을 위해 오늘도 숨어버렸던 과거에 노크를 해본다. ‘너, 자니? 들키기 전에 용기를 내봐.’


중국 해변에서의 추억(?)
너무 저렴한 비치복이었는지, 안감이 없었던 것이다.
쿨하게 비치복만 입고 동료들과 너울대는 파도로 뛰어들었다.

글. 김민수

한창 IT기술의 발전과 수요가 급증하던 중국시장을 위해 1년에 1/3은 중국에서 보낼 정도로 출장이 잦은 때가 있었다. 정말 내 집 드나들 듯, 한국에서 오전에 준비해 중국에서 오후를 마무리할 정도로 중국은 가까운 곳이었다.
지금처럼 한창 뜨겁던 여름. 해결하지 못한 버그 때문에 주말도 없이 중국의 심천 지사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지사에서 주말 야유회로 바다를 가기로 했다며,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아직 일도 끝내지 못했고, 여벌의 옷을 준비해오지 않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가족처럼 오랜 시간 함께 지낸 동료들의 제안을 마냥 거절할 수 없었다. 수영복은 해수욕장에서 사면 된다하기에 출근 복장 그대로 그들의 승용차에 올라탔다.
우리가 향한 곳은 따메이샤라는 해수욕장이였다. 아직 성수기가 아닌지, 아니면 날씨가 흐려서인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주차장에서부터 쭈욱 늘어선 물놀이 용품점에서 나는 가장 저렴해 보이는 비치복을 여러 실랑이 끝에 한국 돈 오천 원에 구매했다.
비치복 한 장을 달랑 들고 들어선 해수욕장의 매표소와 탈의실은 내가 초등학생이던 80년대 중후반의 한국의 해수욕장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설은 좀 촌스럽긴 하나, 그래도 탁 트인 바다를 보니 그때까지 떨치지 못했던 잔업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면서 빨리 바다로 뛰어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잠시 고민했다. 너무 저렴한 비치복이었는지, 안감이 없었던 것이다. 비치복 안에 속옷을 입자니 돌아갈 길이 걱정되어, 쿨하게 비치복만 입고 동료들과 너울대는 파도로 뛰어들었다.
파도는 흐린 날씨에 바람이 있어서인지 한국에서 느끼던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계속 된 야근으로 인한 저질체력과 나이 탓에 파도와 씨름하며 나아 간 지 10여 분도 안되어 물만 제대로 먹고 해변으로 다시 되돌아 나왔다.
가쁜 숨을 내쉬며 해변가에 철퍼덕 주저앉아 눈물 콧물을 쏟으며, 한동안 안정을 취했다. 안경을 쓰지 않아서 같이 물속에 뛰어들었던 직원들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 앞에서 젊은 여성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 찍는 모습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얼마나 숨을 골랐을까. 내 머리카락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바람결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앗! 비치복의 실밥이 다 터진 게 아닌가!! 그러자 순간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던 수많은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나는 일어나 한손으로 바짓춤을 잡았다. 그리곤 중국어도 안 되는데 안경도 없어, 보이지 않는 눈으로 탈의실 열쇠를 가지고 있는 직원을 찾아다녀야 했다.
지금도 중국을 생각하면 얼굴이 저절로 빨개 진다. 다시금 바라본다. 모두 다 잊었길.


의도치 않았던 외국인 행세
자연스럽게 대화에 일본어가 섞여 나오곤 하다 보니
나를 외국인으로 오해하신 게 문제였다.

글. 김보현

공부를 목적으로 갔던 일본 유학. 힘들게 가게 된 유학이기에 유학 생활을 하면서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한국어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고 생활을 하다 보니, 부모님·지인·친구들과 인터넷 전화를 할 때도 가끔 쉬운 단어나 문장이 생각이 나지 않아 일본어로 대화를 이어가거나 대화가 끊긴 일이 종종 있었다. 그게 귀국 후 호되게 혼나는 계기가 될 줄이야!
지금은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 정도로 혼자서 여행하거나, 먹으러 다니는 일이 이상스럽게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혼자서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 이런저런 눈빛을 받기는 한다지만, 예전에는 그런 시선이 더욱 심했다.(내가 여자라서 더욱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귀국 후 바로 취업을 하지 않고 심신을 달래고자 여기저기 혼자서 여행을 다닐 때의 일이다. 혼자서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먹고, 영화를 보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꼭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여자 혼자? 헤어졌나 봐?” 등등. 수군수군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소리들과 은근슬쩍 흘끗거리는 시선, 또는 계속해서 응시를 하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부끄러웠던 나는, 나도 모르게 여행을 하는 동안 외국인인 척을 하기도 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니 사진을 찍어달라는 말을 특히 많이 해야 했던 어느 날, “저기요~ 샤신 좀 톳데… 아니 찍어주세요~.”라는 말이 화근이 되었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섞인 말이 튀어 나온 것이다. 물론 내 입으로 말을 하긴 했지만 의도를 갖고 한 말은 아니었고, 또 너무 자연스러웠던 탓에 사진을 찍어주시는 분도 흔쾌히 “오케이~!”를 외치며 사진을 찍어주셨다. 이후 일정이 겹치는지 사진을 찍어주시던 분들과 자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대화에 일본어가 섞여 나오곤 하다 보니 나를 외국인으로 오해하신 게 문제였다.
그분들의 생각에 외국인이 관광지를 다니면서 외국인 할인을 받지 않고 티켓 구매하는 것이 안쓰러웠던 모양인지, 천천히 다가와 외국인 할인코너가 있음을 안내해주셨다. 나는 생각지 않던 그분들의 친절에 “저 한국인이에요~.”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해야 했고, 나의 고백을 들은 그분들은 대뜸 화를 내면서 “한국인이 왜 외국인 행세를 하면서 다니느냐?”고 혼을 냈다. 관광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 갑자기 그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나는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뒤도 안돌아보고 숨고 싶었다. 나의 의도치 않은 행동이 친절을 베풀어 준 그분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괘씸한 행동이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의도를 하지 않았더라도 상대방이 오해를 했다면 그것은 내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때 그분들께 호되게 혼이 나면서 배웠다. 그날 이후 그분들과 남은 일정 동안 여행을 함께 하며 친해지게 되었고, 지금도 간간이 연락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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