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 말에 네 개의 발이 있는 걸
자연적인 거라 한다 
글. 김정탁


황하의 신 하백(河伯)은 황하를 따라 흘러서 북해(北海)에 이르니 황하보다 훨씬 크고 넓은 바다가 있음을 알고는 스스로가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갑자기 자신감을 잃었다. 즉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또 무엇을 사양하고,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자 북해 약은 하백에게 도의 관점에서(以道觀之) 네 종류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첫째, 도의 관점에선 사물이 어떤 게 귀하고 어떤 게 천한 게 없어 이를 반연(反衍), 즉 사물의 끝없는 반복이라고 한다. 반면 사물의 관점에선(以物觀之) 자신은 귀하고, 상대는 천하다고 여긴다. 또 세속의 관점에선(以俗觀之) 귀함과 천함이 확실히 구분되는데, 이 구분은 사물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덧붙여져서이다. 그러니 귀함과 천함은 타고난 본래의 속성이 아니어서 생각을 고정시키지 말아야 한다. 만약 생각을 이런 식으로 붙든다면 도가 큰 어려움을 당해 고생한다.
둘째, 도의 관점에선 사물의 크기와 모습이 무한히 바뀌므로 어떤 게 적고, 어떤 게 많다고 할 수 없다. 이를 사시(謝施), 즉 사물의 변화에 순종하는 거라고 말한다. 반면 차이의 관점에선(以差觀之) 사물이 조금 크면 크다고 하는데 그러면 사물 가운데 크지 않은 게 없다. 또 사물이 조금 작으면 작다고 하는데 그러면 사물 가운데 작지 않은 게 없다. 이처럼 추세에 따라 사물의 크고 작음이 결정되는 것보다 비교의 기준에 따라 사물의 크고 작음이 결정되는 게 보다 도의 관점에 가깝다. 그래야 천지도 곡식의 낱알 정도로 작을 수 있고, 털끝도 언덕이나 산 정도로 클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도에 입각한 차이의 원리이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바뀌는 사물의 크기를 부단히 좇아야 하므로, 우리의 행동을 하나로 고정시키지 말아야 한다. 만약 행동을 하나로 고정시킨다면 이는 도와 크게 어긋나는 처사이다.
셋째, 도는 나라의 군주처럼 엄중하고 엄중해서 사사로운 덕(德)을 베풀지 않는다. 또 도는 제사의 토지신처럼 유유하고 유유해서 사사로운 복을 내리지 않는다. 또 도는 사방의 끝남이 없는 것처럼 넓고 넓어서 아무런 경계를 두지 않는다. 도의 이런 특성으로 말미암아 도는 만물을 고루 어루만져 편안하게 한다. 그러니 도는 누구를 특별히 받들거나, 또 누구를 특별히 돕지 않는다. 모든 만물을 똑같이 평등하게 대할 뿐이다. 이를 가리켜 도의 무방(無方), 즉 어느 곳에 치우치지 않는 도의 자유라고 말한다. 게다가 만물마저 하나같이 가지런하므로, 도는 누가 짧고 누가 길다고 말하지 않는다.
넷째, 도에는 시작과 끝이 고정되지 않아 끊임없이 순환한다. 반면 사물에는 삶과 죽음이 있으므로 사물의 살아있는 현 상태만 믿어선 안 된다. 또 사물은 한 번은 텅 비고 한 번은 가득 차서, 그 모습이 일정하게 고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물의 현재 모습을 가리켜 사물의 전부로 착각해선 안 된다. 게다가 세월은 되돌릴 수 없고, 시간도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물은 스러졌다가 살아나고, 가득 찼다가 비워지고, 끝나면 다시 시작한다. 이것이 대의(大義), 즉 큰 의로움의 방도로서 개개 사물이 아닌 만물 전체의 원리를 말한다. 그래서 사물이 일단 생겨나면 사물의 변화는 달리는 것처럼 빨라 움직여 변하지 않는 게 없고, 또 시간에 따라 옮겨가지 않는 게 없다. 이처럼 만물은 스스로 바뀌기 마련이다. 그러니 우리가 무얼 한다거나, 또 무얼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하백은 어째서 도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가에 대해 묻는다. 북해 약이 앞서 말한 바에 따르면 도의 관점에선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한 게 없다. 그런데도 북해 약이 도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하니, 하백으로선 당연히 의심을 품을 만하다. 북해 약은 도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로서 도를 알면 반드시 자연의 원리에 통달하고, 자연의 원리에 통달하면 반드시 치우치지 않는 균형에 밝아지고, 치우치지 않은 균형에 밝아지면 사물로 인해 자신이 해를 입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 이처럼 자연의 원리에 통달해 치우치지 않은 균형에 밝아지면 우리는 지극한 덕에 이를 수 있다. 지극한 덕에 이른 사람은 불도 그를 태울 수 없고, 물도 그를 빠뜨릴 수 없고, 추위나 더위도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없고, 짐승도 그를 다치게 할 수 없다.

이는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이 도인술(導引術)을 익힌 선비처럼 불, 물, 추위, 더위, 짐승 등을 가볍게 여긴다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잘 살피고, 화와 복 어느 것에도 마음의 흔들림이 없어 편안히 지내며, 떠나감과 머무름에 있어 신중해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불, 물, 추위, 더위, 짐승 등을 가벼이 여기는 외면의 행위가 인위적인(人) 거라면,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잘 살피고, 화와 복 어느 것에도 마음 흔들림이 없고, 떠나감과 머무름에 있어 신중한 것과 같은 내면의 덕은 자연적인(天) 것이다. 그래서 덕은 자연스러운 성질을 지닌다. 그런데 덕이 올바른 자리를 얻으려면 인위적인 행위를 알고서 자연적인 걸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상황에 맞게끔 나아가거나 물러서면서 도의 요점을 돌아가야만 궁극의 도를 말할 수 있다.

이에 하백은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북해 약은 매우 뜻밖의 대답을 한다. 소나 말에 각기 네 개의 발이 있는 걸 두고 자연적인 것으로, 또 말의 머리에 고삐를 두르고, 소의 코에 구멍을 뚫는 걸 두고 인위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본디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가장 자연적인 것이고, 운송 수단으로 삼기 위해 말의 머리에 고삐를 두르거나 경작 수단으로 삼기 위해 소의 코에 구멍을 뚫는 등의 인간의 흔적이 더해지면 인위적인 것이다. 마치 지극한 앎의 상태에서 존재조차 의식하지 않다가 존재를 의식하고, 또 이것/저것으로 구분이 이루어지고, 결국에는 옳음 그름의 구분으로까지 이어지는 이것이 자연적인 상태에서 인의적인 상태로 바뀌는 경우이다.

그래서 인위적인 것으로 자연적인 것을 없애지 말고, 자연의 뜻(命)을 일부로 없애지 말고, 자연스런 덕을 명성을 위해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소나 말이 네 개의 발을 유지하는 것처럼, 머리에 고삐를 두르거나 코에 구멍을 뚫지 않고 원래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는 일이다. 이것이 곧 자연의 참된 상태로 돌아가는 작업이다. 또 이것은 황하의 물에서 북해의 물로, 다시 천지의 물로의 움직임이기도 하다. 천지야말로 가장 자연적인 상태로 있어서이다. 황하나 북해의 물이 아무리 많아도 천지의 물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북해의 물을 천지의 물과 비교하면 큰 산에 있는 작은 돌과 작은 나무에 불과하다. 인위적으로 아무리 많은 물을 만들어 내더라도 황하의 물을 도저히 당해내지 못하는데, 하물며 천지의 물을 어떻게 당해낼 수 있을까?
Ι교수·성균관대학교 소통학. smilejt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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