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가족 곁을 떠나던 날
이젠 마지막이라는 말도 못하고 그냥 큰아버지의 등 모습만
마지막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글. 최송 한겨레중학교 3학년

때는 2015년 봄. 나는 북한 함경북도 회령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큰아버지와 큰엄마, 사촌 동생은 우리 집에서 백 미터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고모는 먼저 한국에 와있는 상태였다. 당시 내 나이는 15살. 학교를 다니고 있을 나이였지만 나는 산과 들을 다니며 이삭을 줍고 나물도 캐며 일을 하고 있었다. 큰아버지와 큰엄마는 일을 했고, 사촌 동생은 유치원을 다녔고, 할머니는 농사일을 하셨다.
하루는 저녁쯤 이삭을 배낭 한가득 줍고 집에 들어 설 때였다. 집에 모르는 남자 한 명이 와 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저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그냥 먼 친척분이 놀러왔다고만 하셨다. 그 다음날이 밝았다.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많은 사진을 꺼내놓고 가족사진 한 장과 돌아가신 나의 아빠 사진 한 장을 챙기더니, 할머니가 항상 쓰던 일기장을 태웠다. 나는 할머니에게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우리, 고모 보러 가자.”고 하셨다. 순간 숨이 멎을 정도로 당황했다. 평상시 그토록 보고 싶던 고모였는데, 그 고모를 보러 간다고 하니 너무 반가웠다.

할머니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큰아버지와 식사를 하고 가자. 가서 큰아버지 모셔와.”라고 하셨다. 그 ‘마지막’이라는 단어 한마디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 했다. 이젠 고모를 볼 수 있음과 동시에, 또 오랫동안 정든 큰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 심부름대로 큰아버지를 모시러갔다. 큰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나는 큰아버지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큰아버지 등 뒤에서 소리 없이 울기만 했다. 큰아버지에게 차마 고모를 보러간다고 할 수 없어서, 이젠 마지막이라는 말도 못하고 그냥 큰아버지의 등 모습만 마지막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촌 동생도 보지 못하고 떠나 왔다.
2015년 4월 1일 새벽 2시, 두만강을 건넜다. 추운 날씨에 밖에서 2시간 동안이나 기다려서 중국 브로커를 만났다. 우리를 데리고 간 브로커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부터는 계속 버스를 타고 90시간을 이동했다. 라오스, 베트남, 태국 등을 거쳐서 한국에 2015년 5월 7일에 도착했다. 올해로 벌써 한국에 들어온 지 3년 차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 나의 큰아버지는 잘 지내고 있는지 너무 많이 궁금하다. 큰아버지는 항상 3월이 되면 다치곤 하셨는데, 올해는 무사히 다친 데 없이 지내고 계신지도 궁금하다.
‘항상 보고 싶은 큰아버지! 이 더운 날씨에 건강은 잘 챙기고 있는지, 많이 걱정됩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학교를 다니며 학생회장도 하고 있고, 북한에서는 가보지 못했을 외국에도 다녀왔습니다. 저는 항상 밝게 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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