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원을 건 한판승부
오락실에서 우연히 만난 선배의 꾀임에
다시 교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글. 이항민

전남 영광 대마면 복평리 섬암마을은 좌산 상사님의 성탄지이자, 나의 본적이다. 전북 익산 동산동에 동산수도원 밑 구멍가게는 나의 출생지이다. 지금은 이마트가 들어선 구)원광중·고 운동장은 내가 뛰놀던 놀이터였고, 팔봉으로 이사한 원광고등학교는 나의 모교이다. 고모와 작은아버지, 사촌 동생은 교무이고, 사촌 누나는 정토이다. 뼛속까지 원불교의 그늘 아래서 살아온 나 이항민에게 출가는 일상이고 삶이고 정해진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100원짜리 동전을 내밀자 50원짜리 동전 두 개를 주었다.

동산초등학교 앞 우주오락실에서 스트리트파이터라는 오락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각 국의 파이터들을 격파하며 한참 피치를 올리고 있을 무렵, 누군가 옆자리에 앉더니 동전을 넣고 대결버튼을 누른다. 교당에서 한 번씩 본 선배였다. 이내 곧 자존심과 피 같은 50원을 건 한판승부가 벌어졌다. 완패였다. 결과에 승복하고 오락실에서 나오는 길, 선배는 농구공 하나를 들고 어디론가 향한다. “형 어디로 가요?” “같이 갈래?” 그건 ‘오빠, 라면 먹고 갈래?’ 보다 충격적인 권유였다.

지금 생각하면 원불교에 다시 이끌려 출가를 하고 교무로 살아가는 운명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사실 일원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초등학교 이후로 점점 교당에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오락실에서 우연히 만난 선배의 꾀임에 다시 교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1994년 싸늘한 밤거리의 방랑자들, 그들의 이름은 ‘동이리 밤이슬’이다.
다시 교당에 다니기 시작한 나에게 교당은 친구들을 만나는 만남의 장소이고, 축구, 농구를 하며 뛰어노는 놀이터였고, 라면에 찬밥을 얻어먹는 식당이었고, 시험 기간에는 공부방이었으며, 첫사랑을 간직한 연애 장소였다.

그 당시 우린 학교-교당-집-교당-학교-교당-집-교당의 삶을 살았다. 하루 종일 친구들과 모여 웃고 놀고 떠들다 저녁 심고목탁이 울리면, 우린 교당의 수호신을 자처하며 함께 교당 주위를 운동삼아 돌아다녔다. 어쩌면 당시 돈도 없고 마땅히 갈 곳도 없었던 우리가 집에 가기 싫은 마음을 달래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밤이슬을 맞으면서까지 동네를 돌아다니며 논다고 하여 우리는 ‘동이리의 밤이슬’이 되었다. 아직도 SNS 모임 밴드에는 그 이슬을 맞고 성장한 ‘동이리 밤이슬’ 회원이 40명 가량 가입되어 있다.

착실히 말 잘 듣고, 죽은 폭 잡고 잘 살아라! 까닭 있게 살아라!
수능을 마치고 간사 생활하러 떠나는 고3 이항민에게 어머니께서 당부하신 말씀이다. 1997년 겨울, 수능을 마치고 집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쯤 전화가 왔다. 고모교무님이었다. “너, 생활기록부랑, 등본이랑 떼어가지고 어서 와라.” 무슨 영문인지 몰라 서류를 가지고 가보니 원불교학과 입학서류였다. 서류를 받은 고모는 나에게 용돈 10만 원을 쥐여 주었다. 그렇게 난 용돈 10만 원을 받고 할 수 없이 팔려가듯 출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운명처럼 태어나 숙명처럼 밤이슬을 맞고 자란 이항민은 50원 오락실에서 운명을 다시 바꾸었고, 10만 원 용돈에 숙명을 거스를 수 없어 출가를 하게 되었다. 운명처럼 내 안에 법종자가 심어졌고, 밤이슬을 맞고 무럭무럭 자란 법종자가 어느덧 싹을 피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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