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도 괜찮다
파도처럼 멈추지 않을 수만 있다면 괜찮다는 것을 나는 안다.
글. 최준식

‘여름’ 하면 떠오르는 감각들이 있다. 비 오는 날, 무겁게 깔린 공기의 감촉과 물비린내, 수영장의 소독약 냄새 등. 물에 대한 이미지들은 여름이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부모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물을 좋아했다고 한다. 바다에 가면 해가 저물어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비가 오는 날 물웅덩이에서 물장구치고 있는 내 모습을 사진에 담으며 즐거워하셨다고 한다. 미술 교실에선 항상 물고기 그림만 그릴 정도였고, 운동이라면 학을 떼는 아이가 즐거워하는 유일한 운동이 수영이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우리 가족의 여름휴가지는 항상 계곡이나 바다였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수영을 잘했다고 말하기엔 어렵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하다는 것을 그 작은 아이는 알고 있었을까. 그저 그 당시엔 좋아하는 물장구를 칠 수 있음에 만족했던 것 같다. 강과 바다에서 떠내려갔던 것만 해도 두 번은 됐고, 정말 죽을 뻔한 적도 있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 계곡에서 놀다가 생긴 일이다. 수영학원에 다닌다는 자신감이었을까, 점점 깊은 곳으로 가다가 발이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미끄러지는 바위에 계속 발을 딛고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오르고, 다시 빠지고…. 저 멀리 보이는 어른들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친 기억도 없다. 놀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저 너무 창피해서였을까. 그렇게 몇 번 수면 위아래를 오르내렸을까. 나는 아버지에게 안긴 뒤, 작은 마루 위에서 물을 토했다. 그 뒤로 나는 수영학원을 다니지 않게 됐다.
달갑지만은 않은 계절이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그녀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됐다고 말할 때도,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했을 때도, 내가 다른 이에게 등을 돌리고 도망칠 때도, ‘나는 아무것도 못 해.’라는 생각이 들 때도 모두 여름이었다. 나에게 있어 여름은 실패의 계절이다.
실패하는 일이 생기면 꼭 혼자 바다를 보러 갔다. 파도는 위로가 되었다. 몇십 억 년 동안 계속된 물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기껏해야 사람이다.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나의 실패는 세상 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바다가 깨닫게 해준다.
나는 여전히 물을 좋아한다. 실패는 앞으로도 내 인생의 돌고 도는 계절처럼 다가올 것이다. 또 다른 실패가 언제 다가올지 모르기에 두려움과 불안, 끝없는 자기 의심이 나를 좀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괜찮다. 나에게는 ‘실패해도 괜찮다.’라는 믿음이 있다. 설령 부서지고,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하고 흩어지더라도 파도처럼 멈추지 않을 수만 있다면 괜찮다는 것을 나는 안다.
실패해도 괜찮다. 다시 움직일 수만 있다면.


정작 쓸 수 있는 물은 없다니!
하지만 물이 다 빠지며 이제 다 끝났구나 하는 순간,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글. 유영상

작년 여름, 텍사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미국 교환학생에 합격하여 텍사스의 남서부 쪽 보몬트라는 작은 곳에 파견이 되었다. 2017년 가을부터 2018 봄 학기까지 공부를 했는데,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보낸 한 달은 미국에서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이 되었다.
오리엔테이션도 끝나 학기가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며 기숙사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행복하게 지냈을 때다. 수업 시작 일주일 전, 필요한 것들을 모두 준비하고(전공 책값은 30만 원이 넘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 수영장에서 파티를 열고 놀며 설레는 맘으로 기다리고 있던 찰나, 사건이 터졌다. 허리케인 ‘Harvey’가 올라온 것이다.
Harvey로 말할 것 같으면 미국 역사상 가장 강수량이 많은 태풍으로, 4일마다 여러 지역에서 강우량 1미터에서 1.5미터까지 내리며 미국에 약 1250억 달러의 피해를 입힌, 휴스턴 일대를 홍수로 만들었던 태풍이었다. 휴스턴에서 동쪽으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보몬트는 내가 막 도착한 학교가 있던 곳이었다. 주변 모든 지역은 홍수가 나 다들 집을 버리고 대피소에서 근 한 달간 생활을 했다. 아주 소수의 장소들만 운 좋게 물에 다 잠기지 않았는데, 그 중 하나가 내가 있었던 기숙사 빌딩이었다. 캠퍼스 대부분이 물에 잠겼는데,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다. 휴스턴, 보몬트는 대표 야생동물로 Alligator(미국 악어)가 유명하다. 홍수가 나니 야생에 있던 악어들이 휴스턴 도심에 올라와 뉴스에도 났었다. 그만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환경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식사는 식당에서 배급 받은 샌드위치와 음료로 대신하며 방에 박혀 2주일간을 생활했다. 물이 점점 빠지면서 주변 소규모 케이터링 회사에서 우리 학교에 바비큐를 제공해주기도 하고 무료 보급품을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물이 다 빠지며 이제 다 끝났구나 하는 순간,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보몬트 전 지역의 물이 오염되어 모든 물공급이 끊겨버린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많은 물을 맞았는데 정작 쓸 수 있는 물은 한 방울도 없었다. 결국 매일 끼니마다 식당에서 2개의 500미터 패트병을 받아, 마시고 쓸 수 있었다. 화장실도 이동형으로 설치해 밖에서 해결하고, 샤워는 패트병 물을 30병 모아 며칠에 한 번씩만 했다. 그 한 달간의 경험은 교환학생 1년 중에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고,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주었다. 오히려 그 일을 겪고 나니 모든 일에 놀라지 않고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서 샤워할 때 물을 절약하며 샤워한다. 깨끗한 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보나마나 천생연분?
모래사장에 앉아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남편의 눈에,
갑자기 뭐가 반짝였대요.
글. 박효순

저와 남편은 학교 CC였습니다. 동아리에서 만나 8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지요. 연애 4년 차 일 때 남편과 제가 천생연분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10년 전쯤 졸업생들의 여름 MT가 있었고, 저희는 당연히 함께 참석을 했습니다. 모두 함께 바다로 놀러갔는데, 물을 싫어하는 남편은 모래사장에 앉아 있고, 저는 동기, 선배, 후배들과 함께 바다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지요. 다 커서 노는 바다 물놀이인데도, 너무 신이 나더군요. 튜브도 없이 펄쩍펄쩍 뛰며 파도를 탄다며 신나게 놀고 있는데 같이 놀던 선배의 안경이 바다에 빠졌습니다. 다 함께 찾아보았지만 당연히 바다에 빠진 안경은 찾을 수가 없었지요. 마냥 행복했던 우리는 금새 잊고 다시 바다에 들어가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번에는 제 안경이 없어졌습니다. 사실 저는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못 찾을 텐데, 신나게 놀기나 하자!’고 생각했죠.
그때 모래사장에 앉아 있던 지금의 남편은 같이 앉아 있던 다른 동기에게, 쟤는 차도 가져왔는데 어쩌려고 그러냐는 둥, 찾으려는 노력도 안한다는 둥, 계속 제 걱정을 해대면서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더라죠. 사실 저는 시력이 너무 안 좋아서 안경을 일반 안경점에서는 살 수가 없고, 주문을 해야 맞출 수 있거든요. 생각해보면 그때 참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당장 집에는 어떻게 가야 하는지 걱정도 안했으니까요.
‘정말 어떻게 걱정도 없이 그렇게 놀 수 있을까.’ 싶은 시선으로 바다에 있는 저를 쳐다보며 혼잣말을 해대던 남편. 그가 갑자기 일어나 바다 쪽으로 걸어가더니 뭘 번쩍 집어 들고 저를 향해 흔들더군요. 저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으니 그게 뭔지도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고 노는 데에 푹 빠져 있었는데 동기가 “저거 네 안경 아니야?”라고 물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라고 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물 밖으로 나가 확인해보니, 세상에 진짜 제 안경이 아니겠어요!
모래사장에 앉아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남편의 눈에, 갑자기 뭐가 반짝였대요. 그래서 집었는데 진짜 제 안경이라 남편도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고요. 주변에서는 “천생연분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잃어버린 안경을 어떻게 찾아 줄 수 있느냐.”며 신기해했고, “결혼을 할 수 밖에 없는 인연”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말들을 했어요.
저와 마찬가지로 안경을 잃어버린 선후배들은 남편에게 어떻게 안경을 찾았느냐, “내 안경도 찾아 달라!”는 민원을 쏟아냈어요. 당연히(!) 찾을 수 없었지만요.
아직도 바다에 가면 그때가 생각나 웃음이 피식피식 나와요. 오랜만에 바다에 놀러가야겠어요. 이젠 둘이 아닌 넷이 가니 기분도 좀 남다르겠죠.
정신없이 놀다가 또 안경을 잃어버리면, 남편은 이번에도 제 안경을 찾아 줄 수 있을까요?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