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인생을 응원해
글. 신하윤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내던 그녀가 얼마 전 천안으로 훌쩍 시집을 가버렸다.
몇 개월을 벼르고 벼르다가 출장을 겸해 그제서야 천안으로 향했다. 동생은 내가 출발하기 전부터 주부다운 면모를 보이며 “무얼 먹고 싶냐?”고 물어왔다. 하지만 만삭인 그녀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새로 산 에어프라이기를 시험도 해 볼 겸 요리랄 것도 없는 연근 튀김을 해 먹어보자고 제안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먼 길 달려오는 손님맞이가 은근 신경 쓰이는 것을 알기에 나름 배려라고 꺼내든 카드였다.

천안 시내버스를 타고 들어선 동네는 예스러움을 아직 담아내고 있었다. 복닥이는 사람들도 없었으며, 낮은 건물들은 숨쉬기에 참 편안한 느낌이었다. 안심이 되었다.
사실 충남 천안으로 시집간 그녀를 일컬어 ‘천안 새댁’이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그 말에는 그녀의 급작스런 결혼 결심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천안에서의 생활에 대한 우려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낮은 주택의 문을 들어서니 그 급작스럽다는 느낌은 운명처럼 느껴졌고, 천안 새댁이라는 시골스런 느낌도 그녀의 마음처럼 편안하게 다가왔다.
성인 세 걸음 정도의 작디작은 텃밭은 과수원집 아들다운 새신랑의 애정이 묻어났다. 중고 싱크대에 시트지를 붙인 것도, 일고여덟 개의 열쇠에 일일이 이름표를 붙여둔 것도 새신랑의 손길이었다.

나의 도착 시간에 맞춰 차려진 밥상에는 연근 튀김이 아닌 내가 몰랐던 그녀의 요리솜씨가 올려져 있었다. 갈비찜에 오이무침, 양배추 쌈은 물론이고, 인터넷을 보고 만들었다는 독특한 참치쌈장, 냉이 된장국까지 모두 고민과 정성으로 양념된 음식들이었다. 부른 배를 움켜쥐고는 상대가 원하는 인생을 응원하는 일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행복과 편안함이 나의 바쁘고 속 시끄러운 마음 한 켠에 쉼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배불리 먹는 것도, 천안의 인심 넉넉한 골목시장을 여유롭게 누비는 것도, 그녀와의 수다로 부른 배 만큼이나 마음을 채우는 것도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외버스 안, 그녀가 손에 들려준 반찬들을 보고 있자니, 소중한 누군가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것이 곧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과 같음을 알았다. 오늘은 이것을 누군가에게 슬쩍 말해주고 싶은 날이다.


로힝야 난민을 만나다
글. 이은정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4월 말에 방글라데시에 있는 로힝야 난민캠프에 방문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난민이나 미얀마-방글라데시 지역의 정치, 종교, 문화, 사회적 배경에 대한 간단한 사전 조사 내용만 가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판단을 유보하고 받아들여야겠다는 심정이었다.
만 24시간이 걸려 도착한 후 다음날 아침. 릭샤와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더 이동한 끝에 캠프 초입에 다다랐다. 아침부터 작열하는 태양과 온몸을 다 둘러싸야 하는 복식 문화에 따르느라 조금만 걸어도 등에 한 줄기 땀이 훅 스몄다.

눈앞에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오는 첫 광경은 지평선 너머로 펼쳐진 천막촌의 규모였다. 대나무와 비닐로 만든 기본적인 모양새의 천막과 간헐적으로 공용 화장실, 우물, 그리고 조금 큰 학교나 병원 같은 기능을 가진 천막들이 넓고 빽빽하게 퍼져 있었다. 그 사이사이 좁은 길들을 조심스럽게 거닐면서 하수시설이 없어 고랑마다 새까맣게 썩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내 몸의 반의 반도 안 될 것 같은 체구의 아이가 그의 배 무게 쯤 되어 보이는 구호물자를 어깨에 걸치고 집까지 멀고 먼 길을 이동해야 하는 일상.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 살던 곳과 가족, 자신의 생명까지도 담보로 걸고 떠나와야만 했던 이들 삶의 이면에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묵직함이 떠다니는 듯 했다.

우리가 모니터링한 프로그램은 여성들을 위한 동료지원, 그리고 공동체 음악을 통한 심리사회적지원 프로젝트였다. 현지에서 활동해 온 아디(ADI) 팀의 배려와 통역의 도움으로 이틀에 걸쳐 프로그램에 참여·관찰하고,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볼 수 있었다. 참여자들의 긍정적인 답변을 들으며 생각했다. 집단적으로 겪은 외상에 대한 심리적 회복을 위해서는 어떤 활동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할까? 결론은 ‘스스로, 함께’였다. 자기 자신을 위한 움직임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는 움직임, 스스로 자신을 도우면서 동시에 주위 사람들도 도울 수 있는 활동. 그들의 활동을 기획하고 지원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또한 우리 자신으로 있으면서 그들 옆에 함께 있는 일.
우리 사회에서 ‘난민’에 대해 물으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시선에서 답할 것이다. 어떤 이는 이국에서 멀고 험한 바닷길을 따라 온 보트 피플을 가리킬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한국전쟁 시기의 피난민을 떠올리며 개발주의적 감상에 젖을 수도 있다. 나 또한 난민에 대한 어떤 특정 시선을 가져왔고, 그동안 그런 시선을 갖는 것이 내게 ‘익숙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겪지 못한 것에 대한 편견은 진실에 대한 일종의 게으름일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 어떤 라벨을 붙이기 전에, ‘그들의 삶에 일어난 고통’에 대한 나의 무지를 마주하고 어디로도 도망치지 않는 게 아닐까.


집에서 시작하는 소확행
글. 유예리

신조어를 보면 사회가 보인다. 요즘 트렌드는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줄임말이다. 행복이란 뭘까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꾸뻬씨의 행복여행>이란 책에서 행복은 미래에 있는 게 아니란 말에 깊이 공감했다. 현재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 내게 가장 중요한 것.
나의 소확행은 이사를 앞두고 시작됐다. 내가 먹는 밥을 내가 짓고, 내가 사는 집을 내가 꾸미는 것. 지금 사는 집은 다섯 평밖에 안 되는 원룸이다. 그러나 작은 방이라 잘 치우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작은 방이라 더 정리가 필요했고, 청소가 어렵지 않았는데도 그렇게나 귀찮았다. ‘왜 나는 못 치우고 살까? 난 왜 이리 게으를까?’ 자괴감에 빠진 날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인식만 하고, 치우겠다는 판단을 보류한 상태로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지냈다.

최근에 작은 바퀴벌레들이 눈에 띄면서 이제야 사람처럼 살기 시작했다. 약도 치고, 소독도 했다. 그동안에는 삼시 세끼를 모조리 사 먹었는데, 최근 몇 주는 밥을 짓고, 요리했다. 2주에 한 번 소셜 커머스로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장 보면, 신기하게도 당일 날 문 앞에 도착한다.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만들어 먹으면, 가끔은 되게 맛있다. 예쁘게 플레이팅해서 사진도 찍으면, 이런 행동들이 내 독립심을 키우면서 나를 성장시키는 것 같아 기쁘다. 사실 별다른 일이 아닌데도 나는 확실하게 성장한 거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리라고 아빠는 말씀하셨다. 또 요즘 트렌드는 ‘미니멀리즘’으로, 가벼움을 추구하는 삶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나는 물건을 잘 못 버리는 성격이다. 평소 별로 관심이 없던 물건들도 막상 버리려 하면, 함께했던 추억이나 처음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소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보관한다. 그래 봤자 창고행이 확실한데도.
오히려 집안일에 관심이 생기면서 도구 욕심이 많아져 전자레인지, 다리미 등을 샀다. 저번 새벽에는 다리미로 블라우스를 다리다 구멍을 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끔 입는 블라우스였고, 오래 입어서 버려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는데…. 괜히 아쉬워서 몇 년 전에 샀던 그 블라우스를 아직도 파는지 인터넷에 검색까지 했다. 세탁소에 가져가 수선해야 하나, 고민도 했다. 이건 나의 소소한 불행이다. 하지만 나는 얇은 블라우스를 뜨거운 온도에서 다림질하면 녹는다는 걸 확실히 배웠다.
지난 5월에는 새로 이사할 집을 보러 다녔다. 사실 아직 집도 안 구했고, 대출도 못 받았고, 어떤 집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집에서 보낸 최근 몇 주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집’을 더 알게 됐다. 그 집에서 새로운, 작고 확실한 행복들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안으로 깊이 파인 상처
글. 이도일

수박을 자르다 칼에 찔렸다.
잘 갈린 날카로운 얇은 사시미 칼이라 깊게 쑥 들어갔다. 칼에 찔리는 순간, ‘이런.’ 하는 마음과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픈 이 상황. 30여 년 세월 동안 많이 부딪혀보고, 찔려보고, 아파 보며, 스스로 아픔을 잘 참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아픈 걸 못 견딜 정도로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 으아~!”라고 고통을 신음으로 분출해야 할 정도는 처음이었다.

상처에서 피가 나오기에 꾹 누르고 있다가 떼었는데도 피가 계속 나온다. 그런데 그 피를 닦아내는 순간 보이는 상처의 크기는 어이없을 정도로 작다. 칼 길이를 대조해보니 안으로 깊이 찔린 듯싶다. 겉 상처는 1센티도 안 되는데, 안으로 한 1.5센티 정도 들어간 것 같다. ‘깊이 건드렸으니 이렇게 아플 수밖에….’ 하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크지 않지만 속으로는 깊은 상처. 겉으로 크게 까이거나, 다리의 드러난 피부가 긁혀서 무릎부터 발목까지 온통 벗겨졌을 때보다도 그 아픔이 훨씬 심하다. 나 자신에게도 그렇겠지만, 내가 대하는 많은 이들이 심적으로 깊게 상처 입었을 때도 이렇겠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론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 안으로 입은 심적·내적 상처는 그 아픔이 훨씬 클 것이다. 그러기에 겉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그 정도 일 가지고 뭘 그래?’ 하는 등의 말은 조심해야겠다 싶다.
어떤 선진님께서 “받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은 남의 세정을 모른다.”고 하셨던 법문이 떠오른다. 남의 세정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깊이 있게 통찰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전후 옆의 세세한 사정을 알고 나야 가능하다. 받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은 늘 포커스가 내게 있기에 주위를 돌아보질 못한다. 딱한 현실이다.

줄줄 안다는 것은 주위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내 손의 겉 상처를 보며 그보다 깊은 아픔을 외면할 수 없기에 겉보다는 속 상황을 치료하려 애쓰듯, 대하는 이들의 세정을 알고자 한다면 대충 보거나 들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주고, 시간을 주고, 공을 들여 세정을 알아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제대로 주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그동안 너무 많이 받는 것에 익숙 해왔던 것 같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고, 공을 들여 내 마음의 세정을 살펴봄과 동시에 교도나 타인의 마음도 깊이 보고, 세세히 알고, 통찰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성직자가 돼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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