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세공에 담은 미래
박진호 금은세공 전통기능계승자
취재. 김아영 기자

“시작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아버지의 말 때문이었어요.”
그가 기억을 가진 순간부터, 금은세공 장인이었던 아버지. 어렸을 때는 불과 세공으로 거칠어진 아버지 손이 부끄러운 적도 있었다. 언제나 디자인 구상에 빠져있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아버지의 그때 그 모습처럼 식사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머릿속은 금은세공 생각뿐이란다. 아버지(박영준 전통기능전승자)의 뒤를 이은 박진호 금은세공 전통기능계승자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은세공 장인이 되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과연 이 일에 재능이 있는 건지도 몰랐고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죠.” 그건 바로 ‘아버지가 40여 년 동안 쌓아온 금은세공 기술이 이대로 사라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겐 하교 후 공방을 놀이터 삼아 도구를 가지고 놀던 추억이 있었다. 30년 동안, 아버지의 모습과 장인정신이 그에게 스며들었던 것이다.
“결정을 하고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배웠어요. 예전처럼 아버지 일을 잠깐씩 도와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 일이 된거잖아요. 배운 기술은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거니까 허투루 할 수가 없었지요.”

아버지에게 “이것밖에 못 하냐! 집중하라.”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는 그. 불과 톱을 다루는 일인 만큼 한시도 정신을 흩트려선 안 된다는 걸 아버지는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요리는 레시피가 있어서 그대로 따라하면 되는데, 세공은 그때의 기온, 환경, 컨디션 등에 따라 완성도가 다 달라지거든요. 감을 익히기 위해 계속 하는 수밖에 없는 거죠.” 또한 기술을 배우면 배울수록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고.

과거의 전통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시대에 걸맞게 개발하고 연구해야 금은세공 기술이 후세까지 길이 남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고민 끝에 서울과학기술대 전통공예 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성과도 뒤따랐다.
“2016년에 대한민국 명인·명품공예대전에서 비녀로 은상을 수상했어요.” 불과 망치를 만지기 시작한 지 5년. 전통공예상품 공모전에서도 잇따라 수상했다. 아버지는 “쟁쟁한 장인들 사이에서 나이도 어린 게 수상하겠냐?”고 말했지만, 정작 그의 수상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무뚝뚝한 부자(父子) 사이가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고 바뀐 건 아니지만, 그는 “장인으로서의 아버지 기술을 존중하고 삶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누우면 어떻게 작품을 만들지, 스케치가 떠올라요. 다만 막상 해보면 그 스케치대로 안 된다는 게 문제죠.” 하지만 계속해서 하고 싶은 게 생기고 배우고 싶다는 의욕이 생긴다는 그. 은세공으로 칼을 만들고 싶다는 목표도 생겼단다. 그가 스스로의 작품을 아직은 투박하고 보완할 점이 많다면서 “10여 년 정도는 되어야 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을까?”라며 웃어 보인다.
“아버지가 저에게 금은세공을 함께 하자며 하신 말씀이 있어요. ‘최고의 금은세공 장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이었죠.” 이제는 아버지의 꿈이 곧 자신의 꿈이기도 하다는 그.

그가 기술 연마 외에도 금은세공 작품을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인터넷 홍보를 하고, 전통공예와 현대문화를 접목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아버지보다 잘 하는 거요? 색은 더 낫지 않나… 해요. 하하. 공예가로서 평생 배워야지요.” 그가 아직 기본이 부족하다고 하자, “이제 기본은 떼었다.”고 무뚝뚝한 듯 묵직한 아버지의 한 마디가 이어진다. 정직하게 한 발 한 발 떼어가는 박진호 전통기능계승자의 발걸음에, 금은세공의 10, 20년 후 미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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