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사와 바랭이네
글. 이정재

바랭이네 이원화는 처사시험하기의 일화를 옆에서 지켜봤다.
그 전후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거기서 사용되던 용어 ‘처사’를 가져다 처화에게도 명명하였던 이가 이원화였던 점은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앞서 살핀바 특정지역에서 법사를 처사로 부르기도 한다 한 점을 상기할 때, 이원화는 처화를 법사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상관성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긴 검토와 설명이 필요한 바다. 처화가 원했던 산신 만나기, 호풍환우의 도사 만나기, 신출귀몰하는 제갈공명 되기 등의 소망은 신장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한 처사 일화와 무관치 않다. 이는 모두 신통력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즉 처화는 이를 위해 이런 저런 시도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이런 내력은 앞선 호에서 내내 살폈던 대각 전에 보았던 옥추경과 그 기도법의 상관성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이원화는 처화의 현실적 성공을 희망했다. 그는 무엇이든 현실적인 소속을 가지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처화이기를 바랐다. 부친에 의해 치러진 독경의식 ‘처사시험하기’는 이원화에게는 큰 희망이었을 것이다. 정신병은 무당이나 판수의 독경을 통해 치료될 수 있는 것이라고 바랭이네는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여인들에게 이런 민간신앙은 당연한 상식이었다. 이런 의식을 통해 처화의 방황병이 나아지고, 나아가 사회적 소속감을 가진 처사가 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이원화가 그에게 처음 ‘처사’ 칭호를 붙여준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일화와 달리 판수의 독경은 성공적이었고, 어떤 차도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즉 기도와 독경의 효험이 있었고, 병이 완쾌되기를 바랐던 의미에서 그런 칭호를 붙여주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판수’나 ‘법사’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공식적인 명칭이다. 일정한 절차없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는 아니다. 단지 처사의 경우는 그 본래 개념이 무너진 상태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붙일 수 있었던 용어이긴 하다. 그래도 용어 처사를 바랭이네가 붙여준다고만 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의 절차에 근거한 명명이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안이 있다. 부친이 외삼촌과 처화를 위해 삼밭재에 초당을 마련해 준 사실이다. 삼밭재는 어린 시절 산신을 만나고자 기도를 드렸던 장소다. 처화는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런데 그 시점이 부친 서거 직전이다. 이는 다시 처사에 의한 독경의식이 있던 시기와 겹친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했던 독경과 어떤 관련은 없는지, 혹은 병을 낫기 위한 어떤 후속 절차는 아니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 못다 한 수행을 다시 하기 위해 시작했다고 보는 관점은(<초기교단사> 1, 150쪽~) 설득력이 약하다. 당시는 병을 앓고 있었고, 그 병은 상당한 중증에 해당되었다. 대체로 법사나 처사를 불러 굿을 한다는 점은 이런 저런 처방을 백방으로 알아보고 난 다음 사용하는 최후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그 시점이 병굿을 한 후의 일이기 때문에 그와 관련을 지어 살펴야 할 사안이다.

삼밭재 기도의 재개는 치병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나, 여기서 상정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병굿을 한 후 병이 치료되자 구사고행을 마저 했던지, 아니면 완치를 위한 어떤 조치를 하였던 지다. 그러나 이 병은 그 후 2~3년 뒤에도 재발된 것으로 밝혀진다. 더 심해진 우두커니병이 그것이다. 병이 완치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병굿을 하고 완치되었는데 다시 기도를 드리러 산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모순이다. 완치란 정상적인 생활의 복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밭재 2차 기도는 병의 완치를 위해 어떤 수단을 강구했던 과정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초당을 마련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처화는 이때 <옥추경>을 만나게 된다고 여겨진다. 병을 유발한 귀신을 쫓아내거나 치병의 방법을 제시했던 당시 유일하고 강력한 경은 옥추경이었기 때문이다(경의 출처와 위상은 앞선 호에서 상세히 논했음). 그러나 이런 노력은 결국 성공을 보지 못한다. 어떤 노력을 강구하였는지는 여기서 논할 단계는 아니나, 그 과정이 길지 않았던 점은 확실하다. 특히 부친이 운명하신 뒤 집안일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초당 수행은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몸을 일으켜 집안을 돌보고 돈을 벌기 위해 탈이섬으로 간다.

삼밭재 초당 마련은 일종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이런 새 출발을 격려하는 데 신이 난 이는 바랭이네였다. 새 출발을 단정 짓는 차원의 명칭 ‘처사’를 부여한 것이 그 이유다. 이 용어가 이원화에 의해 명명되었다는 기록은, 가족들은 이를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의미한 것 같다. 경쟁이로서의 처사라는 선입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법사나 판수라는 명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없지 않으나, 사실 그 기능을 볼 때 이들은 무아봉공의 대승행을 하는 성인에 해당된다. 즉 민간의 사제이자,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안위를 불고하고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 순수한 의미를 볼 때 미신이란 편견으로 평가절하를 할 근거는 없다. 고등종교는 오히려 같은 노선을 걷는 입장에서 서로 격려 해야 할 대상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민간신앙의 미신적이고 전근대적인 행위를 들어 차별을 하지만, 대형 종교도 이런 측면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더 큰 규모의 사회악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시대의 변화와 세태의 흐름에 따라 기존의 질서는 변화된다. 그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조직의 힘이 약한 민간신앙이다. 종교적 가치는 힘의 논리로 재단될 수 없다. 새로운 질서 하에서 추구하는 새로운 종교적 가치는 조직이 아닌 내용적 가치의 실현이 강조되어야 한다.

대각을 한 후 가장 극적인 경험을 했던 이는 아마도 바랭이네가 아니었을까. 만신창이 피부병에 걸려 본가 집에서도 머물 수 없게 된 처화를 거둔 이는 이원화였다. 당시 처화는 거의 폐인으로 취급되던 시기다. 사실 길룡리 마을에서 처화는 내놓은 존재가 되다시피 하였다. 특히 탈이파시를 다녀온 뒤에는 더욱 그랬다. 그런 사람을 처사양반이라 높여 부르며 의식주를 거들어 준 이는 오로지 바랭이네였던 것이다. 그런 폐인이 어느날 갑자기 의관을 고쳐 입고, 말을 하기 시작하며, 사람들을 지도하며, 얼굴에서는 광채가 발해지는 사건이 벌어지자 가장 놀란 이는 바로 옆에서 정반대의 경험을 다 했던 바랭이네였을 것이다.

앞서 그의 기도에서 감명을 주는 대목이 있다.
‘배가 고프나 부르나 으레 껏 아침저녁으로 목욕재계하고 정수를 한 그릇 떠서 후원에 놓고 팔방으로 절을 하고 천지신명께 축원하였다.’

밑줄 그은 부분은 돌이켜보면 실로 눈물겨운 표현이다. 당시 먹을 것이 변변치 못했음은 충분히 추정이 간다. 처화의 끼니를 위해 뜨거운 땡볕에서 고생을 하던 바랭이네의 눈물겨운 모습이 초기교단사에는 잘 그려져 있다. 천지신명께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정성스러웠는지 가늠이 되는 대목이다.

이원화는 이미 정신적 수련을 깊이 닦아 충실한 내공을 닦아놓았다 할 것이다. 대각 후 전개되는 그의 처사가 이를 입증한다. 어느 날 갑자기 얻은 동반자의 대각을 따라 된 것만은 아니다. 그의 덕성은 타고 난 것이었다. 다만 그 인연을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그 빛이 널리 미치거나 좁게 미치는 국한이 결정된다. 인연의 소중함이 재삼 느껴지며, 진정한 기도와 일심이 무엇인지를 가늠케 하는 사건이다. 용어 ‘처사’는 이런 진정성과 깊은 사연이 갊아져 있는 역사적 단어였다. Ι교수·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장. hog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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