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 기행
취재 노태형 편집인

눈이 펑펑 내립니다.
앞산과 뒷산 사이에 갇힌 산마을은 눈 속에 푹 파묻혀 모처럼 고요해집니다. 집집마다 아직 따지 못한 붉은 감들은 하얀 눈 모자를 뒤집어 쓴 채 주렁주렁 바람에 흔들리고요. 낯선 길 위에는 인적이 드뭅니다. ‘어디 곶감 익어가는 집 없나요?’
아마 이것도 인연이겠죠. 애초 목적지였던 산중턱의 마을을 포기하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들른 한적한 마을. 마침 집 앞 눈을 쓸고 있는 어느 중년의 마음씨 좋은 아저씨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눈이 이리 많이 오는데 어딜 찾아가세요.ㅎㅎ”
“어디 곶감 사진 찍을 데 없을까요?”
“그야~, 이 마을에선 우리 집이 곶감을 제일 많이 해요.”
집 마당에는, 첫눈치고는 들녘의 풍년만큼이나 많은 눈들이 소복이 쌓여 반깁니다. 그렇게 무심히 이 층 곶감 말리는 곳으로 향하려는데, 아저씨가 발길을 잡습니다.
“아~, 우리 집 손님으로 오셨는데, 먼저 차라도 한잔하고 찍으세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저기 아랫목에서 일단 커피 한잔하고 해요. 손님 대접은 해야지~.”
영 낯선 사람에게 차부터 내겠다며 막무가내로 안주인을 불러내는 아저씨의 성화를 못 이겨 장작불로 데워진 시골방에 먼저 발을 들여놓습니다. 그런데 안주인의 환대는 더욱 극성맞죠. 부창부수라고 하잖아요.

“아유~, 잘 오셨어요. 우리 집에서 직접 만든 차를 한 잔 해봐요. 커피야 늘 마시잖아요.”
그리고선 얼마 전에 딴 토종꿀을 바구니 채 들고 들어와 먹어보라 하더니, 호두며 사과까지 꺼내 먼 친척을 맞은 듯 스스럼없이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거기에, 돌아오는 길에는 늙은 호박 두 덩이까지 냉큼 선물로 내놓다니요.
그렇게 어느 산골 마을에서 만난 낯선 부부의 훈훈한 인심이 아랫목 따듯한 온기와 함께 아직도 마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세상 시름이 눈 녹듯 오래오래, 말이죠. ‘눈 내리는 날, 어느 낯선 고향에서 이런 횡재 맞아 보셨나요?’

정 많은 부부의 따듯함에 마음마저 말랑말랑해졌나 봅니다. 문득 곶감 먹은 호랑이 생각이 나니까요. 아마 옛 호랑이 이야기도 이런 산골 마을에서 시작됐겠죠.
곶감 준다는 이야기에 울음을 뚝 그친 아이의 모습을 보고 산속으로 냅다 도망친 호랑이의 손자 호랑이가 태어난 해일 겁니다. 아직 겁을 모르는 애기 호랑이가 산속에서 내려와 그 집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죠. 마침 그 집에서도 손자가 태어나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때입니다. 애기 호랑이를 본 손자 아이는 먹고 있던 곶감을 건넵니다. “너도 하나 먹어봐.”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에 애기 호랑이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산골 집으로 내려와 곶감을 나눠먹었죠. “얘, 이게 뭐니?” “곶감이라고 해.” “우리 할아버지가 곶감은 아주 무서운 놈이라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는데.” “아냐, 곶감이 얼마나 맛있는 건데.”

애기 호랑이는 아이에게 달콤한 곶감을 몇 개 얻어 산으로 돌아갔죠. 그리곤 호랑이 가족들에게 자랑을 했습니다. “엄마 아빠, 내가 곶감을 가져왔어요.” 이 말에 호랑이들이 혼비백산 도망을 치며 외쳤습니다. “얘야, 곶감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데 그걸 가져와. 빨리 갖다버려라.” “아니에요. 곶감이 얼마나 맛있는 건데요.” “아니다. 너희 할아버지가 ‘우리보다 더 무서운 게 곶감’이라고 했단다.” “할아버지 는 곶감을 본 적이 없잖아요. 한 번 맛을 보고 판단을 해보세요.”

애기 호랑이 덕분에 곶감을 난생 처음 먹어본 호랑이 가족들은 비로소 ‘곶감은 무서운 게 아니라 엄청 달콤한 것’이란 걸 알게 되었죠. 그때부터 호랑이 가족은 곶감 얻어먹는 재미로 그 산골 집 주위에 머물며 사람들과 가족처럼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믿거나 말거나요.
말랑말랑한 인정은 세상 그 어느 용맹 있는 것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 잊지 말게요. 곶감은 호랑이도 춤추게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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