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문제 해결할 수 있어야 참 불교
싱가포르 원점마음센터 딩롱 스님
취재. 장지해 편집장


“2500년 전에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곤 사람들의 많은 인생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해주었지요.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요?”
지난 5월 9일, ‘치유적 불교상담과 마음챙김’이라는 주제로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 2층 대학선방에서 열린 마음인문학연구소 집중워크숍에 강연자로 나선 딩롱 스님이 던지는 질문이다. 평소 불법의 실용화와 생활화를 강조하는 딩롱 스님. 그는 현재 싱가포르에서 원점마음센터(圓點心學中心)를 운영하며 많은 이들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생활 속에 직접 활용되는 불교
1994년 호주 시드니에서 스님이 된 후 대만에서 공부하면서 학술화 된 불교학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는 딩롱 스님. 그의 생각에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불교의 교리가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작용되는가라고 여겨졌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로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균형감을 상실하거나 괴로움, 부정적 정서, 스트레스를 겪고 있어요. 불교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활용이 잘 되지 않는지 안타까웠죠.”

심리 문제의 해결이나 인간관계 문제 해결에 구체적으로 불교가 적용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그는 심리학과 상담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건 부처님 당시 불교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인간세와 단절하고 산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전통을 지켜오느라 세상을 돕는 일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불교에 대한 반성적 측면도 있었다.

“매년 심리적 균형 상실과 정신적 문제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어요. WHO에서는 ‘2020년이 되면 우울증이 전 세계적으로 두 번째로 큰 질병이 될 것’이라고도 밝히고 있죠. 우울증이 심해지면 자살로 이어져요. 매해 80만 명 가까이 자살로 사망하고 있고, 15~29세 연령대의 두 번째 사망요인이기도 하죠.” 하지만 자살은 충분히 예방가능하다고 말하는 그. 기본적으로 세 가지 조건(①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다는 느낌 ②희망이 없고 ③자신 스스로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느낄 때)이 구비되면 자살로 이어지기가 쉽고, 이러한 이유로 인해 심리상담과 치유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사회적인 전문 상담 못지않게 실제 종교의 역할도 아주 중요하다는데….

“현대의 많은 심리적 문제는 불교적인 다양한 방법과 결합시켜 해결할 수 있어요.” 실제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많은 행동을 하고 관념을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상담은 기본적으로 내담자의 잘못된 가치관과 생각을 교정하는 일인데, 잘못된 행위의 결과는 결국 잘못된 정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더 들어가 보면, 잘못된 정서는 잘못된 생각에 의해 일어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정념(正念, 바른 생각)을 세울 수 있게 해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성제, 팔정도로 구조화시킨 상담
그렇다면 마음 챙김(정념)을 잘 하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딩롱 스님은 “정념은 일상에서부터 중요하다. 인간이 가진 특질 중에 하나는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힘인데, 정념이 있으면 부정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마음챙김을 통해 굉장히 많은 문제를 핵심적으로 뽑아내 해결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이때 마음챙김을 테크닉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사성제와 팔정도, 삼학이라는 체계 안에서 다루어야 일반 심리치료가 가진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가 상담을 할 때 불교 교리는 다음과 같은 단계로 적용된다. 먼저, 사성제(고집멸도, 苦集滅道)로 구조화를 시켜보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고는 결과, 집은 원인, 멸은 목표, 도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어떤 환자에게 의사가 흡연을 권한다. 그러나 환자는 자신의 흡연 습관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금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를 사성제에 대비해 살펴보자. 직면한 문제가 무엇이고(고), 그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이며(집),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고(멸),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문제 해결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를 구조화시키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도)으로 삼학과 팔정도가 등장한다. 앞 사례의 경우에 적용해보면 계속되는 흡연을 멈추는 것이 계, 굳건한 마음을 배양하는 것이 정, 바른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 혜다. 팔정도(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역시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적용시켜볼 수 있다. 딩롱 스님의 말에 의하면 팔정도는 우리 생활의 준칙이며, 종교에 관계없이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다. 그러니 어떠한 문제 요소를 팔정도 각각의 요소에 대입해 보았을 때 맞지 않은 생활이라면, 당연히 괴로움이 따른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과 번뇌는 잘못된 관념으로 인해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어요.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분명하죠.”

마음챙김을 일상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일러달라고 하자, 스님은 “가장 좋은 것은 매 순간 내가 어떤 생각과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습관이 없어 굉장히 어려울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실제 우리가 가진 습관은 정념이 아닌, 마음챙김을 잃어버린 상태(마음놓침)라는 것이다.

“불법은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고, 실천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해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다 연결시키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을 성장시키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거죠. 한 사람의 역량은 작지만 합쳐지면 커질 수 있잖아요? 우리(원점마음센터와 마음인문학연구소 등 마음에 대한 고민과 연구를 하는 곳을 통칭)가 하고 있는 훌륭하고 의미 있는 이 일은, 부처님의 법을 세상에 잘 전하기 위한 일이므로 잘 될 겁니다.”


선불교의 수행·깨달음에 나타난
비선형적 특징에 대한 고찰
오용석 |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돈오’를 중시하는 선불교의 특징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머나먼 미래에 이루어질 무엇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는 지금·여기에서의 현실 수용과 참여라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선불교의 돈오성과 현재성은 비선형(非線型)적 특징을 갖고 있다.
비선형 인과란 원인에서 결과로 일방향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선형 인과에 대한 거부로, 결과가 다시 자신의 원인에게 영향을 주어 그 원인을 재구조화한다는 인과의 양방향성을 가리킨다.

선불교에서 비선형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먼저 십우(十牛)에 주목해보자. 선불교에서 소는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하나의 관계망이며 일을 매개로 마음을 닦도록 도와주는 상호의존의 기제로 작용한다. 십우도를 이해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선형적인 것으로, 심우에서 입전수수까지를 단계적인 수행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심우라는 인(因)이 견적이라는 과(果)를 만들어내고 다시 견적이라는 인(因)이 득우라는 결과를 만들고, 결국에는 마지막의 입전수수라는 최종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심우→견적→견우→득우→목우→기우귀가→망우존인→인우구망→반본환원→입전수수)

그러나 복잡계의 비선형적 입장에서도 십우도를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심우에서 견적으로 나아간다. 이때의 견적은 심우의 연장선이면서도 반대로 심우를 강화시킨다. 이렇게 강화된 심우는 다시 견적, 견우 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형식으로 본다면 심우, 견적, 견우 등은 정해진 실체가 있어서 경험되는 과정이 아니라, 그때그때 경험되는 관계를 통해서 함수적으로 등장하는 사건에 불과하다.( … 심우↔견적↔견우↔득우↔목우↔기우귀가↔망우존인↔인우구망↔반본환원↔입전수수 … ) 더 나아가 마지막 경지인 입전수수는 소를 찾아나서는 심우와 분리되지 않는다. 심우와 입전수수는 근본적으로 차별이 없다. 육조혜능이 말한 것과 같이 “깨닫지 못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한 생각을 깨치면 중생이 부처”인 것이다.

심우, 견적, 견우 등의 과정은 불변의 실체로 추상화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경계를 만들면서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우주가 복잡계의 비선형적 인과를 통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숭산 스님의 선원(禪圓)에 나타난 비선형적 특징을 살펴보자. 숭산은 비선형적 복잡계를 “오직 모를 뿐”이라는 방식을 통해 직관적으로 통찰하는 것을 중시한다.
숭산은 원(圓)을 사용해 선 수행을 설명한다.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원은 0도에서 시작해 90도, 180도, 270도, 360도를 돈다. 360도 지점은 처음의 0도와 똑같다. 0도에서 90도까지 지점은 집착과 생각의 영역이다. 생각은 욕심이고 모든 욕심은 고통을 부른다.

두 번째 180도의 영역은 생각이 전혀 없는 영역이다. ‘공’을 경험하는 상태이다. 이 지점은 생각 이전의 지점이기 때문에 말이나 단어가 없다. 세 번째는 270도의 영역이다. 이 영역에 도달하면 ‘나’가 없는 완벽한 정적의 마음을 가지게 되며, 또 그 경험에도 집착하지 않는 우주적 에너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영역에 멈추면 ‘자유’에 집착하게 되어 잘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마지막 360도의 영역에서는 주체도 없고 대상도 없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된다. 한 순간에 무한의 시간과 공간이 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러한 선원(禪圓)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0도와 360도 지점 즉 분별의 영역과 궁극적 경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선불교에 나타나는 수행·깨달음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것을 깨닫는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은 0도와 360도의 차이에 관한 것이다. 0도와 360도의 차이는 중생과 부처의 차이, 번뇌와 보리 등의 차이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이에 대하여 숭산은 “집착하지 않는 생각”을 강조한다. 생각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집착하지 않는 생각”의 중요성이다.
세 번째 특징은 분리되지 않는 전체성(全體性)이다. 숭산이 말하는 0도, 90도, 180도, 270도, 360도의 경계는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를 설명한다기보다 수행과 깨달음,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등의 관계를 통합적으로 보여주는데 의미가 있다. 선원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입체적으로 이해하면 수행을 해나가는 한 지점과 수행의 완성되는 지점을 매 순간 만날 수 있다.
선불교에서 중시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이 관계하는 현실 경계이다.


분노와 공격성을 평화와 행복의
마음으로 바꾸는 일상적 마음챙김 수행
니르베이 싱 | 미국 어거스타대학교

불교에서는 고통이 생기는 것 중의 하나가 분노라고 합니다. 분노라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일어납니다. 명상 수행이 도움이 되겠지만, 일상생활에서 갑자기 자리에 앉아서 명상을 한다거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마음챙김을 통해서, 인내와 수용을 배우는 것입니다.

샨티데바(Shantideva)라는 8세기의 스님은 분노를 넘어서 자비심과 이타심을 기르는 것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입보리행> 이라는 책에서 분노의 치료제로써 ‘인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는 방법으로 멈추는 것을 얘기하죠.
샨티데바의 충고를 21세기의 우리가 어떻게 가져다 쓸 수 있을지 생각해보며, 일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마음챙김의 방법으로서 네 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호흡을 챙기는 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기본적으로 호흡을 그대로 지켜봅니다. 오직 숨이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대해서 보는 것입니다. 호흡이 들어오면 목구멍으로부터 배라든지 가슴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잠시 멈추는 듯했다가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면 호흡이 길거나 작거나 이런 게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호흡에 집중하면 어떤 다른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의식은 호흡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호흡을 따라가면 온몸을 의식하게 되고 몸이 편안히 안정됩니다. 만일 분노가 일어났다면 몸에서 분노가 일어난 것이 보입니다. 왜냐면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에, 호흡을 불안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명상은 ‘발바닥 명상’입니다. 만일 몸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느꼈을 때 잠시 멈추는 것입니다. 멈추게 되면, 몸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게 되고, 내 의식은 그 변화를 집중해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을 발바닥으로 내보내는 겁니다. 이것을 즉각적으로 하게 되면, 감정이 사라지게 됩니다. 발바닥 같은 중립의 장소에는 좋다, 나쁘다 같은 감정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조금 더 난이도가 높아집니다. ‘충동 파도타기’입니다. 파도 위에 마음을 얹어 놓는 겁니다. 호흡 위에다가 마음을 얹어 놓기만 합니다. 호흡에는 시작하는 단계, 중간 단계, 끝나는 단계가 있습니다. 파도타기처럼 일어나고, 중간 단계를 지나 파도타기처럼 내려갑니다. 마치 호흡 명상과 같죠.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짐을 반복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을 때, 그때 멈추고, 충동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겁니다. 보고 있으면, 그 충동이 그냥 사라집니다. 특별히 내가 그 상황에 반응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서핑하듯 호흡 위에서 그 충동을 타고 넘어가는 겁니다.

세 번째로 ‘멈추기-관찰하기-호흡하기-확장하기-반응하기(SOBER)’가 있습니다. S는 멈춤에 해당합니다. 나에게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B는 호흡입니다. E는 확장해서 보는 겁니다. 화가 나는 상황이 됐을 때,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전체적으로 넓게 바라보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 상대를 때리면 기분이 좋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고통으로 이끌면 또다시 나에게 고통이 오기 때문입니다. R은 실제로 관여를 하는 겁니다. ‘내가 그냥 가만히 있는 걸로 하겠어, 때리지 않겠어.’ 같은 거지요.

네 번째로 ‘센파(티베트 불교 용어로, ‘우리가 붙잡혀 있는 곳’ 혹은 ‘마음이 계속 관여하게 되는 짜증스러운 것’이라는 뜻)와 연민 머무름’ 명상을 하는 내용입니다. “싱 교수님 진짜 일 못 해.” 그 얘기를 들으면 굉장히 기분이 나쁘고 마음 안에서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가봐.’ 이런 마음이 생길 겁니다. 후크(Hook)라고 표현했는데요, 무슨 일이 생기면 거기에 걸려드는 거죠. 예를 들어 옻에 옮았을 때 굉장히 긁고 싶지만 이때 긁으면 더 안 좋아집니다. 공격성도 한번 하게 되면 계속 안 좋아집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높은 단계의 수행인데요. 이 후크를 찾게 된다면 명상을 통해서 그것을 치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옻에 옮은 게 너무 강하면, 어쩔 수 없이 긁게 됩니다. 그래서 초기 단계에서는 효과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다음 단계가 잘 머무르기 같은 건데요. 센파(Shenpa)가 작동을 안 하면 이 두 번째 것은 작동할 겁니다.

지금 소개해 드린 네 가지 일상적인 마음 수행의 방법들은 마음을 잘 가꾸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샨티데바가 8세기에 남긴 어떤 그런 가르침을 21세기 현재 이렇게 적용해 보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실제 수행한다면, 그 변화를 확실히 보장합니다.


경악과 경이
- 깨어있는 삶을 위한 이정표 -
문동규 |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일상세계에서의 산과 물은 항상 보았던 그것으로서 단지 우리에게 단조로움만 제공하지만,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이는 산과 물은 그것들의 풍요로움을 드러낸다. 마음이 달라진 깨달음에 이른 경지에서의 삶이란 ‘깨어 있는 삶’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삶,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삶이다.

이런 삶은 ‘경이(das Erstaunen)’라는 놀라워하는 기분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과 사물이 자신들의 고유함을 간직하고 있고 성스럽다는 것을 느끼는 기분인 경이 말이다. 그러나 경이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과 사물을 단지 수단으로 여기고 그 수단을 통해 세간적인 가치를 달성하는데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삶을 벗어날 수 있는 길, 우리가 인간과 사물에 대한 경이의 기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 그것은 바로 어떤 것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라는 기분인 ‘경악(das Erschrecken)’이다. 인간이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경악이라는 기분을 통해 경이라는 기분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어떻게 해야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의 폐해와 비본래적인 삶을 걷어내고 본래적인 삶 내지는 깨어 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다양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경악’이다.
경악이란 말 그대로 ‘소스라치게 깜짝 놀람’을 말한다. 왜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는가? 어떤 것과 어떤 일이 친숙하고 편안한 것이었는데 그렇지 않아서 그렇다. ‘친숙하고 편안했던 어떤 것이나 어떤 일’이 아주 무섭고 위험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것으로부터 뒤로 물러나 그것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도대체 왜 그것이 그런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왜 그런 것이냐’는 물음 말이다. 이러한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를 경악하게끔 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생각한다.

우리를 경악하게끔 하는 것은 현대기술에 의해 드러난 황폐화와 비본래적인(일상적인) 우리의 삶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본래적인 삶을 방해하고 우리의 본래적인 존재방식을 위협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본래성 내지는 고유성을 지키고자 하는 것 때문에 경악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경악에서 인간이 행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로 원래의 근원적인 세계로의 ‘전향’ 내지는 ‘회심’, 황폐화된 세계로부터 ‘벗어남’이리라.

경이란 대개 ‘놀랍고 신기한 것 또는 그럴 만한 일’이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것에 놀라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놀랍고 신기하게 여기는 어떤 새로운 것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이의 기분은 언제나 곁에 있던 존재자가 예전에 보았던 그런 존재자가 아니라 새로운 존재자로 보일 때 나타난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새로운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 자체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 있다고 해서 우리가 경이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변해야 가능하다.

경이란 경악을 통해 사물에 대한 지배의지를 내던져 버릴 때 나타난다. 경이의 기분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아왔던 존재자에게서 놀랍고 새로운 것 또는 신비로운 충일함을 볼 수 있다. 왜 같은 세계와 사물이 다르게 드러나고 다르게 보일까? 그것은 바로 세계와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고 느끼는 우리의 마음 때문에 그렇다. 우리의 마음과 존재방식의 변화는 경악을 통해 어떤 것을 지배하려는 욕구와 의지를 내던져버릴 때 가능하다. 인간이 존재자의 존재가 건네는 소리를 들을 때,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에 젖어들 때 가능해진다. 인간이 존재자의 존재와 함께 속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표상적이고 계산적인 사유 방식을 저 멀리 내던져 버려야 존재하는 모든 것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어깨동무하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은 우리의 이용 대상이나 사용 수단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자의 존재에 대해 열려 있으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은 경악과 경이라는 기분을 느낄 때,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방식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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