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빵을 만들며
자는 내내 내일이면 익혀질 빵을 생각한 것일까.
그런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글. 장애란

우리 아이는 올해 일곱 살이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에 나는 요즘 아이에게 한글과 수학을 조금씩 가르치고 있다. 덧셈 뺄셈은 곧잘 하지만 한글 쓰기를 너무 싫어해서 초등학교에 갔을 때 한글을 제대로 쓸까 걱정이다. 그런데다 유치원이 끝나 집에 오면 놀이터에서 2시간이나 노느라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집에 와서도 매일 게임을 하려고 하니 내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하루는 아이가 아빠와 자동차 놀이를 하고 싶은데 아빠가 바쁘다며 놀아주지 않자 이내 시큰둥해졌다. 그런 아이가 좀 안 돼 보여 “우리 빵 만들어볼까?” 하고 말을 건네니, 아이의 얼굴이 환해지며 냉큼 부엌으로 온다. 사실 나는 제빵에 큰 관심도 없고 오븐도 없어서 빵 만들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는데 핫케이크 가루로도 빵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볼에 달걀을 풀고 아이에게 거품기로 저어 보라고 하자 아이는 무척 신나하며 열심히 저었다. “엄마, 언제까지 저어야 돼?” “많이~!” 아이는 거품기로 젓는 걸 꽤 힘들어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저었다. 그리고 나머지 재료를 넣고 내일 아침 잘 구워지기를 바라며 잠들었다.

보통 어제 일이나 며칠 전의 일은 잘 잊어버리는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엄마! 빵 맛있게 익었어?”라며 먼저 물었다. 자는 내내 내일이면 익혀질 빵을 생각한 것일까. 이젠 조금 더 자란 것도 같아서 대견하기도 하고, 그런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럼~!” 밥솥에서 맛있게 익은 빵을 보며 아이는 매우 신기해했다. 밝게 웃으며 빵을 맛있게 먹는 모습에서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행복이 뭐 대수인가. 이렇게 아이가 웃는 모습, 맛있게 먹는 모습에서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한때 나에게 행복은 너무 먼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안 좋은 일이 연거푸 생기면서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고 지인들은 나를 걱정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라는 생각에 행복해지는 방법을 검색해 보기도 하고, 운동도 해보고 댄스도 배워보았지만 행복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향긋한 커피 향과 입에서 느껴지는 커피 한 모금.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는 순간, 놀이터에서 즐겁게 뛰어놀며 웃는 아이의 모습, 아이 얼굴에 뽀뽀하는 것, 작은 일이지만 일이 끝났을 때의 고마움, 저녁에 TV를 보며 맥주 한 잔 하는 것, 당일치기에서 느끼는 자연의 싱그러움, 비온 뒤의 맑은 공기 등에서 행복이 서서히 젖어든다.

동화 <파랑새>가 떠오른다. 동화의 주인공 틸틸과 미틸은 행복을 찾아 멀리 떠나지만, 결국 행복은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역시 가까운 곳에서,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 웃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우연한 행복
비 오는 날 창문을 열면 들리는 빗소리는 나뭇잎과 흙 위로
툭툭 떨어지면서 아름답게 울렸다.

글. 한서연

나는 이 집이 싫었다.
우리 집 앞에는 언제나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이곳에 처음 이사 왔을 땐 상상도 못한 전투력을 가진 모기가 몰려와 괴롭혔고, 벌들이 창가에 붙어서 벌집을 만들며 집안까지 들어와 겁을 줬다. 시끄러운 매미가 낮잠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매년 개구리도 들어왔다. 그게 싫어서 오랫동안 창문을 열지 않고 생활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답답하고 어둡게 살다 보니 태어나서 처음 비염에 걸렸고, 피부까지 안 좋아져서 고생을 했다. 다시 창문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때, 창문을 열면서 내 마음의 문도 함께 열었다.
전에는 몰랐다. 우리 집은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주택가 중에서도 창문을 열면 유일하게 풀냄새가 상쾌하게 진동하여, 시골집에 와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비 오는 날 창문을 열면 들리는 빗소리는 나뭇잎과 흙 위로 툭툭 떨어지면서 아름답게 울렸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듣던,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언제부턴가 나는 비를 기다리곤 했다.

비만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비 오는 날마다 우리 집을 찾아오는 까치도 기다렸다. 어김없이 나무 사이로 들어와 비를 피한 그 까치는 내가 어린 시절 항상 가지고 있던 ‘비 오는 날 새들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창문 앞 나무에 둥지를 튼 새들이나 매일 놀러 오는 참새들과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익숙해질 무렵, 창문 앞 자연은 나를 떠나갔다. 그 자리에 빌라가 들어서기로 결정된 것이다.

그 후 나는 다시 빽빽한 건물들 사이에서 살아야만 했다. 생생한 예전 기억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건물이 들어서고 난 후부터는 그 자리에서 까치를 볼 수 없었다. 자주 오던 개구리도 사라졌고, 벌레도 오지 않았다. 귀찮기만 했던 그것들이 아쉬움과 소중함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후회로 밀려왔다.

비가 오면 싫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시원한 비가 내리면 괜히 신나고 행복해진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거리를 지나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었을 나무를 한 번씩 쳐다보고, 어딘가 숨어있을지 모를 새를 향해 “안녕!” 하고 인사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거나, 여러 감정을 떠올릴 수 있음에 감사하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때 그 까치, 작은 벌레, 개구리를 만나보지 못했더라면 자연이 주는 행복을 결코 몰랐을 것 같다고.
어린 시절 겪었던 그 작은 추억이 불씨가 되어 소소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기에, 지금의 나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비가 내린다. 시원하다!


흙으로 빚는 시간
도예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작품이 탄생되는 과정을 알게 해주며
행복감 등을 알 수 있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나의 소확행 아닐까.

글. 김민정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에세이 <랑겔한스섬의 오후(ランゲルハンス島の午後)>(1986)에서 처음 쓰인 말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뜻한다고 한다.
‘소확행’이라는 주제로 글을 부탁받고 ‘이 단어가 나의 삶에 과연 있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흙이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을 한 지 14년이 되었다. 지금은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혼자만의 시간이 길다. 이 생활은 어떻게 보면 보통사람들과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보내는 나로서는, 그냥 일상 그 자체가 소확행이라고 생각된다.

흙은 나에게 행복을 주는 매개체이다. 머릿속에서만 존재한 것들이 손에 의해서 눈앞에 나타날 때의 즐거움, 새로운 것을 만들고 표현해보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일, 작업의 결과물에서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있는 작품이 나왔을 때에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 일에서 아직도 무한한 변화를 느낄 수 있을 때 즐겁다. 그냥 평범한 일상이라고 느껴지는 이 일에서 나는 행복을 느낀다.

최근에는 도예를 접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그릇 만드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행복을 느낀다. 같은 것을 만들어도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이 느낌은 나 혼자만의 작업에서는 느낄 수 없는 행복감이다. 수업을 통해서 자신이 만든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며 값진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즐겁다. 자신이 만들어낸 물건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을 공유할 수 있는 것에 기쁨이 있다.

도예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작품이 탄생되는 과정을 알게 해주며 그분들이 만드는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감, 결과물을 통해서 느끼는 행복감 등을 알 수 있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나의 소확행 아닐까.
지금 내가 이곳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음이 나에게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무언가 특별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나의 마음에 오는 확실한 이 행복감이 삶의 원동력이고 활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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