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가을에,
나는 핑크뮬리를 보러 간다
취재. 노태형 편집인

1.
가을을 건너려 합니다.
가파른 산길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 단풍들이 새벽녘에는 마을 어귀 냇가 징검다리를 건너는가 싶더니, 저녁 무렵 강어귀에 다다라 떠날 채비에 부산합니다. 작별의 시간은 늘 아름답습니다. 떠남은 또 다른 만남의 씨앗이니까요. 그러니 미련이 길거리를 배회하더라도 너무 반가워 마세요. 훌쩍 떠난 이가 어느 날 문득 돌아온 그날을 기억하잖아요. 인연은 그렇게 봄여름가을겨울을 떠돕니다.

2.
가을 길목에서 방황하는 버릇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핑크뮬리 보러가세요.”
꿈틀꿈틀 영어 필기체만큼이나 낯선 이름.
“그게 뭔데?”
“미국에서 건너온 ‘분홍억새’인데, 이게 요즘 엄청 핫(hot)해요.”
아마 석양의 억새밭이 연상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억새밭에 갈까 했는데….”
인연도 이렇게 시작되겠죠. 일종의 연상 작용처럼, 말이죠.
머뭇머뭇 하던 그가 다시 말을 잇습니다.
“느낌은 완전 다를걸요?”
그동안의 가을은 늘 울긋불긋 거칠었습니다.
내가 태어났던 마을 뒷산이 늘 그랬고, 열병을 앓거나 숨 가쁘게 산허리를 오르내리던 그때도 그랬었고, 최근에도 솔직히 그랬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념이 습관처럼 빨갛고 노랗게 굳어진 거죠.

3.
저 멀리 분홍빛 안개가 바람에 일렁입니다.
그 안개를 헤집고 사람 서넛이 강을 건넙니다. 분홍빛 강물이던가요? 정강이로 건너는 그 강 위에서 여자와 남자는 연인이 되고 사람과 사람은 인연으로 만납니다. ‘몽환적이다.’ 아마 꿈길을 거니는 듯, 그 아름다움에 취한 것이겠죠.
혹자의 말처럼 ‘대한민국의 가을을 통째로 집어삼킨’ 핑크뮬리가 한국에 건너온 건 불과 4년 전인 2014년이라고 하는군요. “단풍만큼 가을을 대표할 수 있는 식물을 찾다가 우연히 잡지에서 핑크뮬리를 보고 심기 시작했다.”는 양지선 제주 휴애리자연생태공원 대표의 말. 그렇게 최초로 심기 시작한 핑크뮬리가 지금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우리의 가을을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빨강과 노랑으로만 채워진 가을에 싫증을 느끼나 봐요.”
그러게요. 그래서 누군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색깔로 가을을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세상을 뒤지겠죠. 개벽시대가 도래하니 자연도 이제는 사람들의 취향을 따라 변하는가 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가을 보러 갈래, 핑크뮬리 보러 갈래?”
“핑크뮬리가 가을이에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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