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심법’과 ‘심전계발’ 법문이 지닌
현대적 의미
글. 박윤철

현대는 ‘마음’ 관련 학문과 산업이 붐을 이루는 시대다. 미래에 유망한 직업을 예측하는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마음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심리학 관련 산업을 으뜸으로 꼽곤 한다. 심리학(心理學)은 ‘마음에 관한 학문’으로 마음 작용에서 모종의 일반적 법칙을 찾아내려 하기도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적인 마음의 모습을 탐색하여 마음의 병리(病理)에 다가가려 한다.
뇌의 다양한 기능을 통해 마음의 실체를 찾아내려고 하는 뇌과학(腦科學)적 어프로치(approach, 도움닫기)도 바야흐로 각광을 받고 있다. 생물학에서는 진화론을 인정한 토대 위에서 동물생태 관찰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포착하려는 연구도 활발하다. 시나 소설 등 문학(文學) 영역은 언어를 통한 미(美)의 창조임과 동시에 인간의 ‘마음’의 모습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언어 이외의 매체를 사용하는 예술 작품과 예능 영역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에서도 ‘마음의 철학’이라 하여 마음에 대한 학문적 해명을 추구하고 있고, 모든 종교도 마음의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정치학이나 사회학과 같은 사회과학 영역에서도 공공적(公共的)인 장면에서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인 이상, 일반적인 법칙만 찾아내려는 것이 아닌 ‘마음에 대한 모종의 통찰’이 전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마음에 대한 어프로치는 실로 다양, 다채로우며, 각각의 어프로치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로부터 드러나는 마음의 모습도 다양하고 다채로워서 통일적인 파악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물리·화학적인 뇌의 작용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간주되는 마음, 개인적인 차원에서 타자(他者)와 관계를 맺을 때 작동하는 마음, 고릴라나 로봇 속에도 있다고 인정되는 마음, 꽃이나 향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 그리고 문명·문화를 창조하는 반면 때로는 다른 문명이나 문화를 배제하려는 마음 등. 이 같은 다양한 마음을 하나의 통일된 언어로 설명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또한 그같이 ‘다양한’ 현상들이 ‘하나의’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현대세계에서 최대의 화두로 떠오른 마음. 그 마음에 대해 원불교에서는, 아니 소태산 대종사는 언제부터 주목하기 시작했을까? 원불교 교리 형성사 및 경전 발달사 등을 공부하다 보면, 현행 원불교 교리의 기초가 확립되는 시기가 저절로 눈에 들어온다. 그 시기는 바로 1930년대이다. 1930년대에 원불교 교리의 기초가 확립되고 있는 증거로는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 일원상(一圓相) 교리가 <회보> 38호의 ‘일원상에 대하여(정산 종사)’와 <회보> 40호의 ‘일원상을 모본하라(소태산 법설)’ 등을 통해 체계화 되고, 그 일원상 교리를 담은 교서가 잇따라 간행되고 있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1935년에 일원상 교리가 담긴 초기교서 <조선불교혁신론>과 원불교 예법의 기본 강령이 담긴 <예전>등이 간행된 것이나, 같은 시기에 기관지 <회보>안에 기본교리와 관련된 다양한 기사들이 실리고 있는 사실 등이다. 그러므로 이번 호에서는 마음과 관련하여 ‘용심법’과 ‘심전계발’에 관한 대종사의 법문을 함께 읽어가도록 한다.

<대종경> 교의품 29장에서 30장에 걸쳐 나오는 ‘용심법(用心法)’ 법문은 마음에 관한 소태산의 대표적 법문 가운데 하나이다. 이 법문의 원형은 ‘병자동선(丙子冬禪)’ 곧 1936년 겨울 정기훈련 당시 대종사께서 설한 법설이다. 이 법문은 구타원 이공주 종사에 의해 수필(受筆)되어 <회보> 33호(1937년 3월호)에 실린다. 법설 제목은 ‘나는 용심법을 가르치노라’이다.

주목할 것은, 같은 호에 원산 서대원 선진이 기고한 ‘마음을 찾으라’라는 글도 함께 실려 있다는 점이다. ‘마음을 찾으라’는 <능엄경(楞嚴經)>에 나오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난존자 사이의 ‘마음에 관한 문답’ 내용을 번역하여 소개한 것인바, <회보> 33호에서 40호까지 총 6회에 걸쳐 소개되었다(38호, 39호 결). 이렇듯, 마음 관련 법문과 기사가 <회보>에 집중적으로 발표되고 있던 1930년대 중반, 소태산 대종사는 마음 사용하는 법에 관해 이렇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만일 이 세상이 이대로 물질문명만 되어 가고 정신문명 즉 용심법을 모른다면 누구나 보고 듣는 대로 각자의 욕심만 채우려는 데에 결국 개인, 가정, 사회, 국가가 피해로 악화되어 이 세상은 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니, 그러므로 나는 진즉부터 그를 염려하여 누구에게든지 용심법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창하였노라. (<회보> 33호, 9쪽.)  
    
위와 같이, ‘용심법’ 즉 마음 사용하는 법은 단순히 개인 차원의 마음공부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물질문명 전반의 폐단을 극복하고 치유할 핵심적 ‘방안’으로써 제시되고 있다. 즉 대종사께서 제시한 ‘용심법’은 갈수록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는 물질문명에 ‘용심법’으로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그 물질문명이 인류 전체를 위한 참 문명이 되도록 하는 공부론(수행론)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심전계발’ 법문의 유래를 찾아가 보자. <대종경> 수행품 59장과 60장에 실린 ‘심전계발’에 관한 법문의 원형은 <회보> 21호(1935년 12월호와 1936년 1월호 합간호)에 실린 원산 서대원 선진 수필의 ‘心田啓發’이라는 제목의 법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법문이 나오기 직전인 <회보> 19호(1935년 8~9월호 합간호)에도 구타원 이공주 종사가 쓴 ‘심전을 계발하자’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1935년에 들어와 조선총독부가 대대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심전계발운동’으로부터 일정한 영향과 자극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대종사와 구타원 종사가 말하는 ‘심전계발’은 식민지조선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한 조선총독부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즉, 대종사께서는 ‘심전’에 대해

저 밭에서 여러 가지 풀이 늘 나오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성품 가운데에서는 무슨 마음이든지 늘 나오고 있지 않은가? 밭에서는 풀이 나고 성품에서는 마음이 나오는 고로 저 밭에 비(比)하여 마음 심자 밑에 밭 전자를 붙여 심전이라 한 것이다. (중략) 심전이란 말이 근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자래(自來)로 있는 말이다.

라고 하여 ‘심전’이란 말이 1930년대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랜 유래를 가진 용어이며, 그 뜻은 바로 ‘성품에서 다종다양한 마음이 일어나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라 했다. 이 말씀을 통해 현대사회의 다종다양한 마음 관련 학문은 소태산이 설명한 ‘심전’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계발’의 뜻에 대해서도

심전은 그러하거니와 계발이란 또 어떠한 의미인가. 이는 알기 쉽게 묵은 밭을 다시 개척하여 양전(良田)을 만들자는 말이니 이 심전을 계발하는 것도 저 묵어 있는 밭을 개척하기와 조금도 틀림이 없나니라. (이상, <회보> 21호, 12~13쪽.)

라고 아주 쉽게 풀이했다. 그리하여 그 ‘심전계발’이 곧 원불교를 개교한 근본 목적이라고까지 강조하셨다.
마음에 관한 다종다양한 학문과 관련 산업이 널리 주목받고 있는 지금, 마음에 관한 다종다양한 어프로치와 우리 원불교의 ‘용심법’과 ‘심전계발’을 하나로 통합하는 새로운 시도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