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도 교무님 할 거지?”
글. 정은수 

“정은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 기억 속에서 처음으로 출가 서원을 외쳤던 때는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영향이 있었겠냐만 “은수도 교무님 할 거지?”라는 질문에 “네.”라고 했던 대답이 미래를 좌지우지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청소년기를 맞이했지만 세 자매 중 둘째인 것이 복이었을까, 출가를 권유하는 교무님은 내 기억에 한 분도 없었다. 첫째인 언니의 출가에만 관심이 커서 ‘나에게도 교무하라고 물어보면 꼭 하겠다고 해야지!’ 했던 다짐은 생각으로 끝났다. 그 즈음, 출가라곤 생각도 안 해봤을 언니가 교무를 하겠다고 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그건 거짓일 거라고, 출가서원도 내가 먼저 했다며, 심통 아닌 심통을 부려봤지만, 언니에게 그저 소리칠 뿐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 사춘기에 접어든 난 장래에 대해 고심하다 ‘저기 멋져 보이는 교무님의 모습을 난 따라하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출가 결심을 고이 접고 방황했다. 그러던 중 신선한 만남이 찾아왔다.

만덕산훈련원에서 하선을 처음 나게 되었다. 길게만 느껴지는 일주일 동안 괜찮은 척, 힘들지 않은 척하며 지냈다. 이것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방학을 항상 만덕산에서 지내게 되었다. 처음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지만, 고등학생으로의 마지막 방학도 고3 신성회가 아닌 만덕산 동선을 선택했다. 방학마다 다닌 만덕산 훈련은 자연스럽게 출가에 대한 마음을 잡게 했다. (사실 처음 만덕산 훈련 때, 고등학생이 와서 대단하다고 칭찬하며 저 친구는 출가할 사람이라고 소개를 받았었다.)

그 후 학부(원불교학과) 시절을 맞이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어린 생각에 ‘모든 사람이 출가는 하고 싶어서 했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각자 특별하고도 다양한 출가 서원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출가의 이유가 ‘그냥’이었던 나는 조금 더 새롭고, 특별한 출가서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마 튀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다니기도 전부터 엄마를 따라 출근하듯 교당에 드나들었던 나에게 교무님의 모습은 당연하기도, 우상이기도 했다. 마치 그 모습이 미래 내 모습으로 딱 들어맞는 정답 같았으니 말이다. 교당의 일꾼인 부모님을 보며 ‘나도 저 모습으로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것도 같다.

돌아보면 철없던 나의 학부 시절, 방학이 되면 방학간사라며 훈련 때만 찾아뵙는 나에게 이양신 교무님의 “정은수!!”라는 불호령은 그저 당연했다. 그 불호령은 서운함보다는 정신을 차리는 촉매제였다. 혹 잘못한 행동에 “지금 당장 훈련원을 나가라.”고 하셔도 내가 오히려 더 있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출가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늘 함께하는 가족처럼 찾아왔다. 물론 그 안에는 어릴 적 “교무할래?”라는 질문에 대답했던 “네!”라는 대답의 무게가 크게 남아 책임감을 부여했다. 지금의 나에게 출가란, 믿고 기다려주며 함께 걸어가는 스승님이 계시기에 ‘그냥’ 걸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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