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이기자
글. 김도공

‘내가 나를 이기자.’
원기 103년도 경산 종법사의 신년법문이다. 이때, ‘나’는 누구이고, 나를 이기는 ‘내’는 누구인지 궁금하다. 내와 나가 서로 다르지 않다면, 다르지 않은 내가 나를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내나 나나 보통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여기에서는 이겨야 할 나가 있고, 그 ‘나’를 이기는 ‘내’가 있는 것이다.
이 법문 말씀은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다. 나는 온갖 사심과 잡념으로 물들어 있어 극복해야 할 대상인 ‘현실의 나’이고, 내는 그 사심과 잡념으로 가득한 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진 ‘본원의 나’라고 할 수 있다. 이 법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나를 이기는 방법이다. 그 방법을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우선 우리가 정확히 봐야 될 ‘현실의 나’의 모습이다. 다양한 모습이 있을 수 있지만,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나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마취된 삶을 사는 나이다. 무엇에 마취된 줄도 모른 채 주변인들에게 마구 피해를 주면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다. 마취돼서 사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가까이 가기를 피하는데, 그 피하는 모습을 즐기면서 사는 모습을 보이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강급의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 번째, 도취된 삶을 사는 나이다. 가지고 있는 얄팍한 재능과 능력에 스스로 도취되어 주변에서 제법 받들어 주는 모습을 즐기며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다. 주변에 비록 많은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스스로 자만자족하여 성장의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살아가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강급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지만 더 이상 진급의 길을 쳐다보지 않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아는지 모르는지 가면으로 가린 채, 가면을 덮은 채 살아가는 나이다. 마취되지도 않은 듯, 도취되지도 않은 모습으로 스스로 ‘공부니 수행이니’ 하면서 공부인·수행인의 가면 속에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다. 스스로의 가면 속에 갇혀 살아가는 모습의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진급도 강급도 아니지만, 은산철벽에 갇혀 있으나 갇혀 있는 줄도 모르거나 그 철벽 안에서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이기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세 가지 부류에서 나는 어떤 부류인가를 확인하고 그 모습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내가 나의 모습을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현실의 나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법이다. 진실한 자기 모습 앞에 온전히 바로 서게 될 때, 내가 나를 이기는 공부가 시작된다. 가관의 모습이 보일 수도 있고, 간혹 대견스런 모습이 보이기도 할 것이다. 이때 대견스러운 모습이 자주 보이면 좋겠지만, 그건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이 공부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상당히 오랫동안 하다가 다음 단계로 건너가야 한다. 그건 바로 무아의 나를 보고 확립하는 것이다. ‘현실의 나’를 바라보던 ‘본원의 내’가 과연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무아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본원의 내가 드러난다. 무아를 넘어서야 참나(眞我)가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기 103년, 교단적으로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교단체제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우선 중요한 것은 나의 변화, 내가 나를 이겨서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 보인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