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들의 떡국공양
글. 서시은

결산법회를 순조롭고 깔끔하게 잘 끝내고, 봉공실에서 공양준비에 한창 바쁠 때다.
누군가가 12월 교화협의회에서 신정절 공양을 앞으로는 서원단에서 준비하는 걸로 결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갑작스러운 말에 우리 단원들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 한동안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황당함이란.
물론 교당에 나오는 어르신들의 기력이 매년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무어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하다. 지금도 매주 일요법회 후 공양준비와, 석가탄신일 및 명절대재 때 대중공양, 주말마다 교당청소를 책임지고 있는데….
그 부담감을 알기에 선뜻 단원들에게 “우리가 하자.”고 나설 수가 없어, 난감해하고 있을 때다. 누군가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지금처럼 우리식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라며 위로하듯 제안한다. 그 말이 고마워서 “당연하죠. 부담 갖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죠.”라고 화답했다.
그 말을 받듯, 다른 단원이 “새해인데 떡국으로 한번 준비해 볼까요?”라는 제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신정절 때 떡국을 먹어본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쉽지는 않겠지만 새해니까 오랜만에 떡국공양 한번 해보게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단원들이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마음과는 달리 우리 단원들은 서로 하나 된 마음으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서로를 격려하면서 즐겁게 신정절 점심공양을 준비했다. 떡국의 맛은 보장할 수 없었지만 젊은 교도들이 정성껏 준비한 공양이어서일까? 교무님과 법호단 어르신들 그리고 교도님들까지 떡국을 맛있게 드시며 칭찬하시기에 바빴다. 그 말씀에 우리 단원들은 더욱더 용기를 얻고, 무슨 일이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우리 단원들은 주로 30, 40대로 이뤄져 있다. 그러기에 어린 자녀를 키우면서, 직장과 가정생활을 함께하는 워킹맘들이다. 또 마음공부도 열심히 하는 원불교 공부인들이다. 요새 말로 슈퍼우먼인 셈이다.
그럼에도 궂은일,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이 있을 때마다 함께 힘이 되어주는 법동지들. 항상 감사하고, 고맙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우리 서원단 단원님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퍼즐 한 조각
글. 서양준

최근 우리집 거실에는 1000피스 짜리 퍼즐이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정토와의 화합을 위해 함께 즐길 수 있는 취미 거리를 찾다가, 느긋하게 완성하자는 마음으로 큼지막한 퍼즐을 사서 맞추게 된 것이다. 커다란 박스 안에서 무지막지한 퍼즐 조각들이 쏟아져 나온 탓에 온 거실은 퍼즐판이 되었지만, 조금씩 그림이 맞춰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오며 가며 조금씩 퍼즐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했지만, 구석부터 조금씩 맞춰나가니 마치 화두를 풀어가듯 묘한 재미가 있었다. 또 TV나 스마트폰 등을 바라보는 것보다 같이 무언가를 완성해나간다는 것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처럼 느껴져서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퍼즐이 늘 순조롭게 맞춰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술술 풀려서 진도가 쭉쭉 나아가기도하고, 또 어떤 날은 전혀 한 조각도 맞추지 못하기도 했다. 특히 유독 어떤 한 조각이 맞춰지지 않을 때에는 왠지 모를 호승심(好勝之心: 호승지심)에 더 집중해서 퍼즐을 붙잡고 있곤 했는데, 어김없이 오늘도 퍼즐이 잘 풀리지 않는 날이 찾아오고 말았다.
그림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답안지처럼 이미 주어진 그림만으로는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남은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보는데도 전혀 맞는 조각이 없다. ‘혹시 방향이 잘못 되었나?’ 싶어서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모든 경우의 수를 대입해 봐도 영 맞는 조각이 없었다. 혹시나 우리가 미처 꺼내지 못해 퍼즐 상자에 아직 남아있는 조각이 있거나, 어디 의자 밑이나 청소기 속에 들어갔나 싶어 열심히 뒤져봐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환불을 생각하던 찰나, 정토가 다가오더니 이야기한다.
“이 조각 잘못 맞췄네.”
다시보니 내가 맞춰놓은 조각 하나가 잘 못 맞춰져 있었다. 그 자리에 들어갈 조각과 매우 흡사하게 생겼지만 미묘하게 다른 조각이었다. 그 조각을 빼고 나니 그 뒤로는 일사천리. 한 순간에 그동안 골머리 썩히던 자리들이 다 해결되고 말았다.
‘내가 맞다고 생각했던 ‘조각’ 하나는 결국 나의 집착이었구나.’ 엉뚱한 조각을 붙여놨으니 다른 조각마저 맞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 한 조각의 집착을 떼어내고 보니 이제야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연, 내가 이 퍼즐을 맞추는 일에서만 고집을 부리고 있을까? 내 미약한 경험을 빗대어 집착하고 소견에 가리어 지혜를 보지 못하던 내 삶을 반조해본다.


창 밖 풍경
글. 김치완

올겨울은 유난히도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너무나 추운 날씨를 못 견디고 얼어버린 수도 때문에 가려고 했던 식당이나 카페가 임시 휴업을 했다. 친구가 무심코 자가용 안에 두고 내렸던 음료수가 몇 시간만에 꽁꽁 얼어 먹을 수 없게 되었다며 보내준 사진에 웃음이 터졌다. 밖을 나서기가 두려웠던, 이번 겨울이었다.
한파에 맞서기 위해 두터운 옷을 겹겹이 껴입은 것은 기본이고, 얼굴 살이 에이는 추위에 마스크까지 쓰고 밖을 나서고는 했다. 하지만 그 추위에도 내가 고집했던 대중교통은 지하철이 아닌 버스였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버스를 타고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 것은 나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는 몇 분의 기다림도 너무 길게만 느껴지지만, 기다린 버스가 왔을 때 서둘러 교통카드를 찍고 어디에 앉을지 두리번거리는 그 순간이 좋다. 이후 버스 좌석 한 칸에 몸을 구겨 넣고 스마트폰으로 감상할 노래를 선정해서 재생 버튼을 누르고 시선을 밖으로 향하면 눈과 귀가 동시에 즐겁다.
특히 내가 버스를 타기 좋아하는 시간은 보통 직장인들의 점심시간 전후 시간이다. 사람들이 서서히 많아지기 시작하는 퇴근시간 몇 시간 전의 이때 즈음이, 내가 목적지로 향하는 지루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단축시키고, 보다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최적화된 시간이다. 조용하고 한적한 버스 안에서 여유롭게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밖을 바라보면, 창문 밖 세상이 햇살과 함께 너무나도 예쁘게만 보인다.
날마다 버스 안에서 내가 관찰하는 것은 달랐다.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 한 명 한 명을 보기도 하고, 목적지에 점점 도달하는 것을 버스 안내 방송이 아닌 창 밖 표지판을 집중해서 보며 알기도 했다. 버스가 이동하는 구간 중 내가 좋아하는 구간은 한강이 보이는 곳이었는데, 날씨 탓에 겨울 내내 꽁꽁 언 한강을 보고는 했다. 날이 좋은 날에는 이렇게 꽁꽁 언 한강의 빙판 표면에 햇빛이 비쳐 유난히 눈이 부셨다. 낮의 햇살은 밖의 추위와 대조적으로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영하의 계절이 영상으로 바뀌는 걸 보니, 지독하게 추웠던 겨울도 이제 슬슬 지나가려나 보다. 겹쳐 입었던 옷가지들을 이제는 한 가지 정도 생략하면서 갑갑함을 조금 덜어 좋은 반면, 겨울만의 풍경도 함께 보내는 것 같아 살짝 아쉽기도 하다. 봄이 오면 또 다른 풍경이 주는 느낌이 있겠지. 사람들이 말하는 일상에서의 소중함은 이런 소소한 순간들로 엮인 듯하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글. 김유미

오늘 공연 한 편을 보고 왔다.
내가 있었던 극단의 공연이었는데, ‘내가 했던 공연이 이렇게 재밌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 재밌게 봤다. 공연을 보면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영화의 내용과 전혀 관계없지만.)
내가 속했었던 극단의 극 특성상 많은 인물이 나온다. 주요배역을 제외한 사람들은 정말 많은 앙상블로 무대에 등장한다. 적게는 3~4개에서 많으면 10~12개까지 정말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무대 뒤는 전쟁통이다. 각자 많은 의상과 소품들이 있고, 각자의 정해진 위치에는 본인의 의상과 소품이 등장 순서에 맞게 나름 정렬돼 있다. 무대 뒤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어쩌면 이 모습은 무대보다 더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대사를 중얼거리면서 돌아다니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의상을 환복하는 사람, 소품을 분장실에 놓고 와서 허둥대는 사람, 등장과 다음 등장 사이가 촉박해서 뛰어다니는 사람, 무대 위의 배우를 구경하는 사람까지 한 사람도 가만히 있는 사람이 없다.
내가 했던 공연이라 그런지 오늘 공연을 보면서 무대 뒤의 상황이 절로 그려졌다. 그래서 배우들이 더 안쓰럽기도 하고, 더 멋있어 보였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땐 그게 물론 최선이었겠지만, 왜 조금 더 하지 않았을까.’ 바보 같은 생각도 해본다. ‘한 번 더 연습하고 한 번 더 의심하면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미래의 나는 공연을 보면서 지난 일에 대한 후회나 미련을 안 가졌을까?’
그래도 그때는 내가 살아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극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의미를 찾아 관객에게 전달하고, 수많은 코멘트를 받아 적용하기까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몸과 머리를 한시도 쉬지 않았던 때 같다.
또 지금에 와서야 ‘왜 그때는 그게 소중한 줄 몰랐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훌륭한 연출님과 배우들과 공연장에서 관객을 만나는 기회가 흔치 않다는 걸 알았음에도 ‘왜 충분히 즐기지를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만 남는 것이다. ‘모든 건 이렇게 지나고 생각하면 너무나 좋은 추억인 것을….’ 내가 많은 애정을 쏟았기에 너무 큰 아쉬움만 남는다. 또한, 다음 작품을 할 때는 모든 걸 감사히 생각하고 임해야 한다는 반성도 해본다.
서두에 언급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것에 대해 정리를 해본다, 그땐 최선을 다했지만,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이다. 매사 어떻게 최선을 다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겠느냐만, 내가 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이라면 그런 마음으로 해야 미래의 나에게 더 떳떳해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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