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智慧)가
언제나 열리려는지
글. 박성철

지난 법회 때 교무님의 설법내용이다.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 도로에 나뒹굴었단다. 교무님은 얼굴에 피가 나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얼른 팔을 흔들어 보았단다. 아침마다 머리 손질을 해야 하는데 한 손으로는 할 수 없기에 그 순간에도 팔에 이상이 없는지 먼저 확인을 했다는 것이다. 팔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사은님, 감사합니다.” 하며 밀친 분에게 괜찮으니 어서 가라고 했다한다. 오히려 전생에 그분에게 빚을 졌는데 이제야 이렇게 갚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30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응급실에서 올라온 어린 환자가 어머니 바로 옆 병상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아이의 얼굴은 온통 붕대로 감겨 있었다. 그 뒤를 할머니가 따라오면서 연신 “감사합니다.”를 주문처럼 외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부모 없는 손자를 데리고 사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손자가 불 땐 아궁이 속으로 기어들어가 큰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할머니, 손자가 저렇게 되었는데 감사할 일인가요?”
“죽지 않고 저렇게 살아있으니 얼마나 감사 허요?”
그러면서 할머니는 틈만 있으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나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감사할 일이 씨 말랐지, 손자가 저렇게 되었는데 그게 감사할 일이냐고….’


지난해 1월 1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일어난 일이다. 새벽기도 후에 떡국도 먹고 교당 뒷산에 올라 해돋이 산상기도도 했다. 가족 모두의 건강과 각자 원하는 서원이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올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귀가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나오다 턱에 걸려 넘어졌다. 벽에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원망이 쏟아졌다. “새벽에 어둠을 뚫고 10여 킬로나 떨어진 교당까지 가서 새벽기도를 하고 산상기도까지 했는데, 이것이 그 대가란 말인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원망을 하다가 얼른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내가 주의하지 않았으면서 왜 원망을 하지?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라고 배웠는데,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았으니 이것이 감사할 일 아닌가? 금년 한 해의 액운을 미리 갚은 셈이니 감사할 일이 아닌가? 그래서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라고 한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원불교에서는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라고 가르친다. 아무리 원망할 일이 있어도 지내온 근본내력을 밝혀 감사하라고 한다. 교무님은 성직자로서 얻은 감사의 지혜이고, 어린 환자의 할머니는 연륜으로 얻은 감사의 지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공부로 얻은 머릿속의 지식에 불과했다. 주고받는 물건이 있거나 도움을 받았을 때 그 은혜에 감사할 줄만 알았지, 이렇듯 원망생활까지도 감사하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 그런 내가 감사를 왜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천지·부모·동포·법률이란 사은(四恩)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은혜인지조차도 모른다. 그러다 티끌만한 어려움이 닥치고 보면 천지·부모·이웃 탓이라며 원망한다. 감사할 줄은 모르면서 원망은 쉽게 해버린다. 어려움이 닥치면 왜 이런 일이 왔을까 따져볼 겨를도 없이 원망을 앞세워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결코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이 ‘내’ 탓임에도 ‘당신’ 탓으로 돌린다.


무엇인가를 받거나 기쁜 일이 있어야 감사하고, 내 것을 빼앗기거나 불행한 일이 닥치면 원망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큰일이 터지고 보면 천재지변으로만 치부했던 것을 인재(人災)로 돌릴 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네 덕 내 탓’이라는 말이 있다. 원망할 일이 있어도 네 덕에 감사하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지식(知識)이 아닌 지혜(智慧)가 언제나 열리려는지….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