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이성, 종교의 존재 이유는?
인간은 결코 이성적이지 않아… 이해 못하는 감성의 영역이 신의 영역이지 않을까
글. 박정원  월간<산>부장·전 조선일보 기자

감성과 이성, Mind와 Brain. 흔히 감성을 ‘Mind’라 하고, 이성을 ‘Brain’이라 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Mind는 ‘마음’이라 하고, Brain은 ‘뇌’로 해석한다. 감성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이성과 뇌가 서로 연결될 수 있겠다. Mind와 Brain 중 인간의 행동은 어느 것에 더 영향을 받을까?
감성과 이성은 인간이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직접적 요소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감성과 이성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해왔다. 감성은 주관적 감정에 의해 반응하는 행위로 여겨져 왔고, 이성은 아주 객관적으로 현상을 바라보거나 판단하는 능력으로 이해돼 왔다. 그래서 감성을 ‘emotion’, 이성을 ‘ration’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짙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감성과 이성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을 끄는 힘은 대개 감성에서 나온다. 대중연설을 할 때 감성에 호소하면 100% 성공한다. 반면 이성에 호소하면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정치인이 감성적이면 성공하지만 이성적이면 십중팔구 실패한다. 똑똑한 사람이 국회의원에 당선돼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성에 호소해서 성공했다는 정치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미국 의학계와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은 뇌(Brain)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굳게 믿어왔다. 반면 종교학자와 영성연구자들은 뇌보다 마음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고 주장해왔다. 어떻게 보면 과학과 종교의 끝나지 않은 전쟁 같고, 이성과 감성의 섞일 수 없는 주장 같아 보인다. 물론 지금도 그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성의 영향이 절대적이고 판정승할 것 같은 상황이, 지금은 감성이 완승하는 상황으로 서서히 바뀌는 추세다.
의학계와 뇌과학자들이 상당할 정도로 마음의 영향, 즉 감성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왔다. 이를 동양적으로 표현하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條)다. 일체의 모든 것이 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의미다. 어떤 극한의 상황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극복할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른바 감성의 힘이다. 그 극한 상황을 단순히 뇌에만 맡기면 인간의 의지나 도전은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감성이 이성보다 더 넓고 광범위하게 작용하는 덕분에 인간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병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최고 의학서인 <동의보감>에서도 ‘마음의 혼란에서 병이 생기고(心亂卽病生), 마음의 안정으로 병이 스스로 치유된다.(心定卽病自癒)’고 했다. 또 최고의 의사는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의사(心醫)라고 했다. 이처럼 전통의학의 핵심은 ‘마음의 힘으로 병을 다스리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일체유심조와 그 맥락을 같이하는 셈이다. 그 옛날에는 병을 주술로 치료했다. 현대의학에서는 얼토당토 않은 얘기로 받아들이지만 전혀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니다. 마음의 힘이 분명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에서도 조금씩 변화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명상을 치료의 한 수단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신경과학자이면서 심리학자인 데이비슨(Davidson, R, J) 박사는 명상을 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수백 명의 환자 임상실험결과를 발표했다. 마음챙김(Mindfulness) 명상을 한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훨씬 더 긍정적 정서를 가지고 있었으며, 업무에도 적극적이고 열성적이었다. 또한 면역기능이 강화되어 감기에 덜 걸렸으며, 감기에 걸리더라도 증상이 약하다는 결과를 보여줬다.

감성은 과학만으로, 뇌만으로, 이성만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이란 존재의 가치를 증명한다. 나아가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4차 산업을 지배하는 현대에서 감성의 영역은 영원하고 계속적인 화두로 남아있다. 인공지능로봇이 유일하게 따라하지 못할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닌 감성의 영역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의 영역, 신의 존재가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의 비이성적 요소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종교는 믿음이라고 한다. 종교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믿어야지 성립되는 현상이 종교다. 아무리 합리적인 종교라 할지라도 믿음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과학으로 그 믿음을 설명할 수 없다. ‘종교가 과학적이다.’라는 말은 장담컨대 100% 거짓이다. 성립할 수 없는 명제다.

곰곰이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살아가는데 감성과 이성 중에서 어느 게 더 많이 작용하는지. 사람을 사귈 때, 투표를 할 때, 사랑을 할 때, 종교를 선택할 때 등 모두 감성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인간적이라고 하는 말도 사실은 감성이 살아 있다는 걸 암시한다. 지극히 감성적 요소다. 로봇과 인간이 똑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인간을 보고 ‘인간적’이라 하고, 로봇보고는 ‘인간 같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감성의 유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성이 전혀 필요 없는 건 아니다. 감성을 보완할 절대적 요소가 바로 이성이다.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를 지금까지 이끌고 온 힘은 이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성을 이끄는 힘은 결국 감성이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절대적인 힘은 감성이다. 인간은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 이성적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사이비 종교나 단체가 순식간에 큰 힘을 얻는 이유도 인간의 말초적인 감성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인간의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원불교는 이성적 감성을 지닌 종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코 말초적 감성에 호소하지 않고 인간의 본질, 즉 이성을 인식시키면서 감성을 가지라는 주문을 곳곳에 하고 있다. 인간이 아마 조금 더 이성적이면 원불교가 더 큰 확장성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인간은 ‘이성적 감성을 가진 인간’일까, ‘감성적 이성을 가진 인간’일까. 새해 들어 종교에 대해서, 원불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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