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렸을 때 저희 삼촌이 할머니 댁에 오면 얼굴이 벌게져서는 할머니에게 “어머니, 제가 돈 벌어가지고 호강시켜 드릴게요.”라고 해요. 그러면 저희 할머니께서는 삼촌에게 “아, 이 사람아! 정신 차려야 해. 이제 자네가 장가도 갔고 아이들도 낳았으니, 더욱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해.”라는 당부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 할머니께서 삼촌에게 하신 ‘정신 차려야 해.’라는 말이 아직까지도 종종 떠올라요.
정말이지 오늘날의 사회는 변화가 너무나 빨라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생각하는 기계가 나온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릴 정도지요.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기계로 만들 수 없는 것이기에, 영혼이 기계를 어떻게 운용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앞으로의 시대에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석두(石頭)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자기 관리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 변화는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겠지요. 이러한 환경에 사업을 어떻게 하고, 가정을 어떻게 꾸려가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 해답을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말로 주셨습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정말로 안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103. 01. 06 서울·경남 원경영인회)

일원세계를 개척하는 주역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나를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에 대한 답은 환경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자승자강(自勝者强)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아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적 자아이고, 다른 하나는 습관적 자아지요. 진리적 자아가 습관적 자아를 이기고 조절하여 잘 부려쓰면 거룩한 성자, 거룩한 부처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이어야 성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누구에게나 우주적 자아와 성자적 자아가 있습니다. 그것이 늘 나를 심판하며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진리적 자아를 발견해서 습관적 자아를 이기고, 조절하고, 잘 활용하면 누구나 실다운 행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외우면서 ‘심지는 원래 요란하지 않다. 어리석지 않다. 그르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막상 경계를 당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른 사람이 되거나, 어리석은 사람이 되거나, 요란한 사람이 되지요. 그러니 진리적 자아의 힘을 쌓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한꺼번에 욕심을 없애거나 변화를 이뤄가기는 어렵습니다.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야 합니다. 만약 오늘 내가 어떤 경계를 당하고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감정이 요란하지 않았다면, 그때가 진리적 자아를 회복한 순간입니다. 또 아주 사소한 일이더라도 결정과 행동이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면 ‘아, 오늘 진리적 자아가 이루어졌구나.’ 하면서 그 순간을 기쁘게 생각하고, 그 경험을 쌓아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쉬운 것부터, 또 가장 미세한 것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하면서 나를 이겨나가고 또 이겨나가면 진리적 자아가 습관적 자아를 이겨내고, 나를 진리적 자아 부처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정말로 내가 나를 이기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103. 01. 01 신정절 기념식)
<도덕경>에 ‘상선은 약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 상(上)자, 착할 선(善)자, 같을 약(若)자, 물 수(水)자를 쓰지요. ‘가장 높은 경지는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환경에 잘 적응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기를 잃지 않지요.
미국을 가든지, 모스크바를 가든지, 낯선 곳에 가면 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처럼 그 사회에 적응을 빨리 해야 환영받는 사람이 됩니다. 원불교가 그 나라에 있음으로 인해 그 나라가 잘 되고, 그 지역이 잘 되고, 그 동네가 잘 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물처럼 자기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문화를 잘 이해하고, 문화에 잘 스며들어야 하지만, 원불교를 그 문화에 잘 적응시키면서도 똑같이 머물지 않고 진일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교화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 아버지여!’가 일상화 된 사회에서 ‘원불교는 신이 없다.’고 말하면 그곳의 문화와 상충되어 잘 받아들여지기가 어렵겠지요. 그 사회에 맞도록 교리를 해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신의 은총으로 산다.’는 말은 우리의 ‘법신불 사은님의 은혜 속에 산다.’는 말과 통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멈추지 않고, 하나이던 신의 은총을 천지의 은총, 부모의 은총, 동포의 은총, 법률의 은총으로 확장시킨 교리임을 설명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103. 01. 16 해외발령 교역자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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