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원불교의 민족운동과 그 성격 
- 구산 송벽조 선진의 사례 -
글. 박윤철

지난 1월 15일, 필자는 독립기념관(충남 천안시 소재)을 공식 방문했다. 지난해 연말 새로 부임한 관장께 축하인사 겸 ‘3.1운동 백주년기념 학술대회’ 공동개최를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이준식 신임 관장은 “독립기념관에서는 현재 아직도 국가유공자로서 서훈(敍勳)을 받지 못한 숨은 독립운동가 발굴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원불교 측에서 협력해 준다면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독립기념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원불교의 경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로써 구산 송벽조, 경산 조송광, 영산 박대완, 유산 유허일, 제산 박제봉, 선산 변중선, 송현풍 선진 등의 사례가 있다는 설명을 들은 이 관장은, 독립유공자로 그분들이 서훈 받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답을 했다. 또한, ‘3.1운동과 근대 한국종교’라는 주제로 열고자 하는 3.1운동 백주년기념 학술대회의 공동개최도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1939년에 구산 송벽조 선진이 일본 천황에 대해 불경죄(不敬罪)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수형(受刑) 생활을 하게 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1930년대 원불교 교단의 동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31년 9월 18일에 제국주의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만주 침략을 개시함으로써 1945년까지 장장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개시한다. 일제에 의한 침략전쟁이 본격화함에 따라 1930년대 식민지조선은 1920년대 이래 일제가 강요한 식량수탈 기지에 더해 침략전쟁 수행을 뒷받침하는 병참기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식민지 조선에서는 전 분야에 걸쳐 전쟁수행에 필요한 전시통제 및 물자수탈이 더욱 강고해져 갔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는 물론이고, 한글사용을 금지하는 대신 일본어 사용이 강제되었으며, 한국 역사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식민주의사학의 횡행과 함께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해방운동은 대대적으로 탄압당했다. 이에 따라 조선 민중의 삶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갈수록 피폐일로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15년 전쟁기’ 곧 전시체제(戰時體制)라는 엄혹한 시대상황 아래에서도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정점으로 삼은 원불교(당시 명칭 불법연구회)는 익산본관을 중심으로 영광지부(1924년) 및 경성지부(1926년) 설립은 물론이고, 영광 신흥출장소(1927년), 진안 출장소(1929년), 진안 좌포 출장소(1930년), 김제 출장소(1930년), 부산 하단 출장소(1931년), 진안 마령출장소(1932년)를 잇따라 설립하는 등 교화(敎化)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부산 남부민 출장소(1934년), 초량 출장소(1935년), 전주 출장소(1935년), 영광 신하리 출장소(1937년), 영광 대마 출장소(1937년)를 연이어 설립하였으며, 1934년 12월에는 일본 오사카에도 지부를 설치함으로써 해외 교화의 문을 열기까지 하였다. 민족사의 암흑기임에도 마치 그 암흑을 타파하여 광명(光明)의 등불을 환하게 밝히려는 듯이 소태산 교조를 중심으로 불법연구회 회원들의 교화 열정은 활활 타올랐던 것이다. 이처럼 1930년대 들어와 일취월장의 기세로 교세가 확장되어가는 불법연구회에 대해 조선총독부 당국이 그대로 좌시하고 있지 않았을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1939년 7월 당시 불법연구회의 교세는 총독부 당국 자료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불법연구회는 1935년말 조사에 의하면 그 교세는 전라남북도에 한정되어 있으며,  포교기관 7개소, 교도수 1천여 명에 불과하였지만, 그후 순조로운 발전을 이루어 공인(公認) 불교계통 유사종교 단체로서는 동학계의 천도교, 시천교에 버금가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현상이다. 현재 본부소재지인 전북 일원에만 하더라도 자금 수만 원을 가진 포교기관 8개소, 교도수 5,975명을 헤아리며, 기타 전남, 경남, 경기도 등에 지부가 있어서 각지의 교도를 합하면 주목할 신흥유사종교이다. (‘사상 범죄로 본 최근의 조선재래 유사종교’, <사상휘보> 22,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40년 3월, 37~38쪽.)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총독부 당국의 감시 하에 놓여 있던 불법연구회에 대한 당국의 탄압은 1936년 9월에 익산본관 구내에 주재소를 설치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한편(‘대담: 일제하의 교단사 내막’, <원광> 105, 1980년 12월호, 86쪽 참조), 1939년 7월 15일자로 불법연구회 마령지부 교무 송벽조(본명 인기) 선진이 ‘대일본제국 도쿄대전내 천황폐하 어하감(大日本帝國 東京大殿內 天皇陛下 御下鑑)’이라는 제목으로 발송한 진정서가 빌미가 되어 불경죄로 체포됨으로써 극에 달하였다. 우선, 구산 송벽조 선진이 천황에게 보낸 진정서의 핵심 내용을 인용한다.

지금 폐하의 등극 이래 조선에 재해(災害)가 빈발하고 있사온 바, 이 같은 현상은 옛 중국의 요(堯) 임금과 탕(湯) 임금 시대에도 있었던 일로써, 이것은 하늘이 성치(聖治)를 시험하는 것이옵니다. 동양의 행복을 위해 소화(昭和)의 연호를 원덕(元德) 또는 명덕(明德)으로 바꾸시옵고, 또한 천의(天意)를 온화하게 하기 위하여 은사(恩赦)를 베푸실 것이며, 사방에 절하고 살피는 일 외에 명산(名山) 또는 야외에 음식을 갖추어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침히 기원을 올리신다면 그 효험이 분명할 것입니다. (이하 생략)

위 내용은 구산 선진이 천황에게 발송한 전문(全文) 1270자로 된 진정서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써 ‘형사재판서 원본(刑事裁判書 原本)’(송인걸, ‘구산 송벽조 대희사 재판기록 입수’, <원불교신문> 937호, 1997년 9월 26일자 참조)에서 옮겨온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구산 송벽조 선진은 전북 경찰국에 의해 체포되어 이듬해 1940년 2월 16일에 기소되었고, 이어서 3월 13일에 징역 1년의 판결을 받고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당시 구산 선진의 나이는 만 65세였다. 구산 선진의 구속은 불법연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교조 소태산 대종사는 이리경찰서에 끌려가 수십 일 동안 구금되어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고(<대종경> 실시품 10장), 영광지부장으로 있던 구산의 장남 정산 송규 역시 광주경찰서에 끌려가 20여 일을 구금당하는 등 가족·친지들까지 수난을 겪었다. 한편, 구산 선진의 ‘불경죄 사건’ 이후에 불법연구회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감시는 가일층 강화되어 갔다. 가까스로 해산은 모면했지만 불법연구회는 일제로부터 국방헌금과 강제징용, 강제공출, 징병의 대상으로 내몰렸으며, 그 기관지(<회보>)는 끝내 강제 폐간의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황도불교화(皇道佛敎化)’마저 강요당했다는 것은 만인주지(萬人周知)의 사실이다.

이처럼, 일제강점 아래의 원불교는 총검을 든 ‘화려한’ 독립운동은 아니었지만 가혹한 식민지배 체제 속에서 오갈 데 없던 조선 민중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심어주는 ‘신앙공동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그 공동체를 위협하는 식민지배에 대해서는 단호한 저항을 펼쳤다. 구산 선진이 그 대표적 사례인 바, 독립유공자로서 당당하게 서훈 받을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기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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