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제사와 설날
글. 장선인

우리 집 설날은, 다른 집의 설날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
할아버지는 설 전날, 그러니까 음력으로 12월 29일에 열반하셨다. 그렇다 보니 음력이 12월 30일까지 있을 때는 설 전전날이 제사, 12월 29일까지 있을 때는 설 전날이 할아버지의 제삿날이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열반하시던 날. 그날의 기억은 사실 어렴풋하다. 언니·동생과 함께 고운 분홍색 커버가 씌워진 고모의 침대에서 방방 뛰어 놀았던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동생은 겨우 세 살, 언니는 다섯 살밖에 안되었던 때였다. 게다가 그날 그 방은 매우 따뜻하고 밝아서 그때가 겨울이라는 느낌도, 슬펐다는 기억도 별로 없다. 그저 설이 가까워지면 으레 할아버지 제삿날이 함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이 설을 준비하는 시간은 좀 특이하다. 어떤 때는 설 전날 음식을 한꺼번에 준비해서 제사를 지낸 바로 다음날 설을 맞이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설 전전날 음식을 장만해서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날 또다시 명절 음식을 장만한 후에야 설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그게 좀 이해가 안됐다. 음력이 12월 29일까지인 해가 있고, 12월 30일까지인 해가 있다는 것을 몰랐으니 말이다.
어쨌든 상황이 그렇다 보니 늘 설에는 제사음식부터 명절음식까지, 맛있는 것을 두 배로 먹을 수 있어 신이 났다. 전을 부칠 땐 언니부터 막내 사촌동생까지 나름의 역할분배가 확실했다. 특히 뒤집개를 잡고 전을 부치는 일은, 우리 여섯 중에서도 서열이 높은 언니나 내가 주로 했다. 동생들은 밀가루를 묻히거나 계란물을 풀거나 잔심부름을 담당했다. 근래의 언젠가 전을 부치던 막내 사촌동생이 “와, 이젠 나도 전을 부칠 수 있게 되네? 어릴 때 이건 항상 누나들만 할 수 있던 일이라서 부러웠는데.”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던 적이 있다.
그러던 것을 할머니와 아빠, 그리고 작은아빠가 상의하여 몇 년 전부터는 음력과 관계없이 설 전날(할아버지가 열반하신 날이 설 전날이기도 하니)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 굳이 음식장만을 하는데 두 번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음식준비를 돕던 우리 자매와 사촌동생들이 취업을 하거나 군대를 가거나 타 지역에서 살게 되는 상황이 점점 많아지는 것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집과 작은 아빠 댁이 모두 한 지역이라서 귀성길 대란에 합류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세 자매가 모두 새벽에 일어나서 열차표를 구하는 노력을 해야만 모든 가족이 명절에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설 전날 열반하신 건, 우리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참 복이다. 명절 전날이 아니라면, 앞으로 흩어져 사는 날이 더 많을 우리 손자손녀가 할아버지 제사를 어떻게 잊지 않고 챙길 수 있겠는가.


트렁크 가득 채워진 마음
글. 안세빈

어릴 땐 설날은 왜 새해 1월 1일이 아니고 한참 지나서인지 궁금했다.
어른들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을 지내는 게 설날이라고 하셨다. 설날이 오기 며칠 전부터 엄마는 분주하셨다. 시골에 사들고 가야하는 음식이며, 며칠을 묵고 와야 하기에 필요한 짐들이 차 트렁크에 가득 찼다. 동생과 나는 명절 중에서도 설날을 유독 기다렸다.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께 받을 세뱃돈을 생각하며 두둑해질 주머니 생각에 기분이 설?다. 시골 할머니 집은 평소에는 4시간이면 갈 거리인데, 명절 연휴가 되면 7~8시간은 걸렸다. 우리는 그 시간을 줄여보고자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출발을 했다. 아직 잠을 깨지 않은 동생과 나는 차 안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했고, 잠에서 깰  때 쯤이면 늘 휴게실에 도착했다. 엄마는 식당 뷔페처럼 즐비하게 늘어선 간식들을 사주며 지루함에 지쳐서 몸부림치는 우리를 달랬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익숙한 마을 어귀에 도착하면 낯선 방문객을 반기는 동네 개들이 일제히 구령을 넣듯 반갑게 짖는다.
“할머니~ 세빈이 서현이 왔어요.” 우리가 왔다는 기척을 목청껏 하면 할머니는 김치를 담그던 손을 다 닦지 못한 채 급하게 나오셔서 우리를 반겨주신다. 양념 묻은 손으로 우리 볼을 비비기도 하신다. 한껏 목소리가 높아진 할머니는 오는 길 힘들지 않았냐며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신다. 엄마가 명절 준비로 며칠 전부터 바쁘셨다면 할머니는 한 달 전부터 바쁘시단다. 우리들에게 줄 것을 준비하고 챙기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신가 보다.
엄마는 짐을 풀고 본격적인 차례음식 준비를 하신다. 어렸을 땐 제사상에 올릴 전을 부치는 일이 그렇게도 해보고 싶어 동생과 서로 하겠다며 투닥거렸는데, 지금은 서로 안하려고 미루는 꾀를 낸다. 해가 바뀔수록 설날에 찾아오는 가족들이 줄어드는데도 할머니의 큰 손은 변하지 않는다. 챙겨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많은 것들을 준비하신 할머니의 마음을 느낄 땐 뭉클해지기도 한다. 우리를 몰래 부엌으로 불러 맛있는 것들을 주셨던 설 전날 밤도 잊을 수 없다.
이런 추억도 잠시, 지금의 우리는 할머니 댁에 가면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기에 바쁜 것 같다. 엄마가 바쁜 틈을 타 아무런 제재 없이 스마트폰을 오랫동안 가지고 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니 말이다. 설날 명절도 끝이 나고 시골을 떠나올 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할머니는 아쉬운 마음을 한숨과 함께 차 트렁크에 그득그득 뭔가를 채워주신다. 손을 흔들며 오래 서 계시는 할머니를 볼 때서야 연휴 동안 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들어드릴걸 하는 후회가 생긴다. 
이번 설에는 떠나올 때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스마트폰은 잠시 꺼두고 더 많이 할머니를 안아드려야겠다.


가족을 잇는 끈
글. 이지원

어렸을 때는 설날만 되면 그 전날 친할머니댁에 온 가족들이 모였다.
할머니 집으로 향하면서 ‘오빠들이랑 뭐 하고 놀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갔다. 그리고 가족들이 다 모이면 손을 닦고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만두를 만들다 지루해지면 친척 오빠들과 오락실이나 피시방으로 놀러 나갔다. 저녁이 되면 친척들이 다 모여 식혀놓은 만두를 먹으면서 윷놀이 대결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다가온 설날 당일은 세뱃돈을 얼마나 받았는지 언니와 비교하는 게 주된 일이었다. 대전에 있는 외할머니댁에 갈 때도 즐거운 기억이 많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언니와 음악을 들으며 간식을 먹고 함께 노는 시간이 좋았다.
그러나 성인이 된 요즘엔 상황이 좀 다르다. 설 전날에 만나더라도 전을 부치고 만두를 만드는 등 일에만 집중한다. 때론 온 가족이 설날 당일에 모여 밥만 먹고 헤어지는 날도 있었다. 또한 성인이기에 세뱃돈 받는 건 고사하고 조카들에게 돈을 줘야 할 판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며칠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한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림의 내용은 할머니와 같이 사는 아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엄마가 없는 손자들에게, 설날이 되어도 새 옷과 맛있는 음식을 사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인상 깊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설에 친척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보내는 평범한 명절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설을 홀로 보내는 어르신 등, 어떤 이들에게는 명절이 결코 달갑지 않은 손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가끔 설날에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힘들고, 전을 부치는 것도 너무 고단해서 ‘명절이 왜 이렇게 많은지.’ 하는 짜증을 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명절이 있어서 일 년에 두 번이라도 친척들을 만나고 교류하게 되는 것 같다.
나도 언젠가 친척들을 못 만나는 날이 올 수도 있고 설날이 오는 것이 우울해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설에 가족들이 모두 모이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번을 계기로 가족과 친척들에게 자주 연락해야겠다. 어렸을 때는 스스럼없이 지냈던 언니 오빠들이었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하고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명절이 아니어도 주말에도 친척들과 만나고 같이 놀러 갔을 텐데, 이제는 서로 시간이 맞지 않은 것도 있지만 관계가 어색해져서 연락하기가 어렵다. 당장 관계가 예전만큼 회복되진 않겠지만 천천히 시작해 봐야겠다. 예전처럼 가족과 친척들이랑 함께 놀러 가고 여행도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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