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부처가 있다
글. 박성철

책상 위에 어른 주먹만한 모과 두 개가 놓여있다. 지난 늦가을 무주 구천동 가족 나들이 때 주워온 것들이다. 처음 주워 올 때는 울퉁불퉁하고 못나긴 했지만 샛노랗고 싱싱했으며 은은한 향기로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검은 반점이 하나씩 생겨나더니, 모과 한 개는 거의 검은 색으로 변해버렸다. 만져보니 물렁거리며 썩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모과로서 생을 마감하면서까지 안간힘을 다해 더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다. 모과는 외형상으로도 울퉁불퉁하거나 제멋대로 생겨 볼품도 없고, 그 맛 또한 시큼하고 떨떠름하여 먹기도 버리기도 마땅치 않는 과일이다. 또 모과나무처럼 뒤틀려 심술궂고 순수하지 못한 마음씨를 일러 모과나무 심사(心思)라는 속담까지 얻고 있다.

이렇게 볼품없는 모과와 나무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분별(分別)없는 우주의 대 평등 원리 때문일지 모를 일이다. 제멋대로 뒤틀리고 제 마음대로 자라려는 심리를 이용하여 아름다운 분재로 다시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열매는 감기 예방과 피로회복 등 여러 질병에 효과가 있어 차(茶)나 약재로 우리네 삶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지 이미 오래다. 특유의 진한 향은 탈취제로서 사랑을 받기도 한다. 전국적으로 20여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특별 관리도 받고 있다. 특히 우리 고장 순창 강천사 앞 개울가에 서 있는 모과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로, 1996년 1월 9일에 전라북도 지정 기념물 99호로 지정되었다. 크기만도 높이 20미터 둘레 3.1미터, 수령 300년이라고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예쁜 것, 아름다운 소리, 향기로운 냄새, 맛있는 음식, 고운 마음씨, 건강하고 잘 생긴 팔등신을 좋아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못생기고 미운 것, 시끄러운 소리, 향기롭지 못한 냄새, 맛없는 음식, 고약한 심보, 못난 육신을 가진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말로는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다느니, 겉보다 속 깊고 마음이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면이 아무리 좋다 한들 일단은 겉모습이 잘 갖추어지고 아름다워야 그 내면도 들여다보는 것이 사람의 심리고 현실이다. 그러나 아름답고 맛있는 과일도 사람의 체질에 따라서는 못 먹는 과일일 수 있다. 먹을 수 없는 독버섯이 더 아름다움을 뽐내지 않던가?

이런 분별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며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것이 부처로 가는 길이라고 배웠다. 그럼에도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자연의 순리임을 알면서도 늙고 아프면 괴롭고 짜증이 난다. 늙어지면 추해지고 친구마저 멀어진다. 늙어가면서 추해지는 것이 어디 육신의 탓이겠는가? 육신의 추함보다는 애착과 욕심의 추함이 더할 성싶다. 어느 노승(老僧)은 “아름다운 꽃은 시들면 쓰레기통으로 가지만 곱게 물든 단풍은 아름다운 소녀의 책갈피에 들어간다.”고 하며 그러한 단풍이 되려면 애착과 욕심을 놓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늙어가면서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볼 것만 보고, 귀가 어두워지는 것은 들어야 할 말만 듣고, 냄새를 잘못 맡는 것은 맡을 냄새만 맡고, 말이 어둔해지는 것은 필요한 말만 하라는 것이다. 또 마음이 옹고집으로 되는 것은 집착과 탐욕을 버리지 못함이요, 몸이 쇠약해져 볼품없이 늙어가는 것은 새 몸 받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늙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못나서 과일전 망신을 시킨다는 모과 2개가 책상 위에서 썩어가면서까지 진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해답을 말해주는 것 같다. 노인과 어른의 차이는 애착과 욕심은 놓고 배려와 나눔은 함께하며 현재의 내 삶에 얼마만큼 만족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른이 되어 자기(모과)처럼 생의 마지막까지 향기를 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다. 우주만유(宇宙萬有)의 허공법계(虛空法界)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처처불상(處處佛像)이 어디 모과 하나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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