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개벽포럼
Again  시대화·생활화·대중화 Creative 원불교
● 진행 박윤철 교수교무·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원장
● 토론 이찬수 목사·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이준원 소장·솔로몬경영개발원 수석컨설턴트
           이도하 교수교무·한국예술종합학교
● 정리 장지해 월간원광 부편집장
● 공동기획 원불교사상연구원×월간원광사


Again 시대화·생활화·대중화
Creative 원불교


박윤철 : 최근 2~3년 사이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현상일 텐데, 그 속에서 종교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새삼 함께 조명되고 있다.

이도하 : 저는 4차 산업혁명의 정의를 ‘가상과 현실과 생체(인간,내면)의 결합’이라고 본다.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동양종교의 핵심으로서 유교, 도교, 불교가 각각 현실, 가상, 생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소태산의 구도과정도 이 삼각 구도 안에서 설명해 볼 수 있다. (우주, 인생, 나라는 삼각의) 의문을 내고 산신(가상), 도사(현실), 입정(생체, 내면)이라는 방식의 접근을 통해 대각에 다다르고, 이후 활동도 현실과 가상을 극단적으로 오간다.

이준원 : 당장 어학원만 봐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언어와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는 기치를 걸고 교육방법을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 우린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 먼저, 교화방법에 있어서 과학기술을 방편으로 잘 활용해 다양한 미디어를 만들어냄으로써 대중교화를 해나가야 한다. 또 스토리텔링 작업이 필요하다. <원불교교전>에 나오는 단어들이 쉽게 읽히니까 그냥 넘어가는 경우들이 많다. 단어 하나 하나에 담긴 의미와 뜻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풀어내야 한다.

이찬수 : 4차 산업혁명도 결국 ‘산업’이다. 산업은 사람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모든 활동인데, 그 기본은 결국 돈이다. 1차든 4차든 그것이 ‘산업’이 될 때 그 산업의 운전수가 산업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산업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을 사용할 때도 자신이 그 물건에 대해 얼마나 주체적인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역량을 제공해주는 것이 종교의 핵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박윤철 : 4차 산업혁명의 긍정적 측면을 선용·활용하려는 관점과,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오는 반인간적·비인간적인 측면 또는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는 과제가 원불교를 비롯한 종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이도하 : 저는 현 사회의 변화가 과연 물질개벽이라는 소태산의 표현과 얼마나 근접하고 있는가 하는데 관심이 있다. 종교적으로 본다면 ‘개벽’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데, 하늘이라는 가상과 땅이라는 현실이 붙어서 융합되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현재 한국은 작지만 강한 ‘IT 문화강국’으로 인정받는다. 소태산의 예언처럼, 한국의 문화나 종교나 정신적 흐름이 시기적으로 중요한 흐름을 맞이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준원 : 1차~4차 산업혁명을 거쳐 오는 특징을 살펴보면 ‘물질’에 ‘서비스’, 다른 말로 ‘정신’이 반영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추세를 분석해보면서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저는 5차 산업혁명은 결국 ‘마음 산업’일 것이라고 본다. 결국 이 변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 실천교학이 되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실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을 키워내야 주변의 변화를 같이 끌어낼 수 있다.

이찬수 : 대종사께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을 한 의미를 추측해보면, 아마 당시 서양의 압도적인 문명에 충격을 받고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한국적 역량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질의 노예가 아닌 물질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면, 정신을 개벽하는데 그치지 않고, 개벽된 정신으로 물질을 다시 재(再)개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물질을 재개벽한다는 건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으니 알파고를 이기기 위해 바둑연습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알파고를 이기는 방법은 알파고를 무시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만드는 목적은 결국 그 기술로 돈을 벌려는 것 아닌가. 그걸 무시해야 한다. 인간이 인공지능에 제압당하지 않아야 정신개벽을 제대로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박윤철 : 원불교나 여러 종교들이 처한 4차 산업혁명이라고 표현되는 이 시대상황은 혁명적 상황, 다시 말하면 개벽적 상황이다. 이는 구태의연한 종교, 과거의 어떤 제도적 종교로서는 이 혁명적 상황에 제대로 응답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미래의 종교, 시대가 요청하는 종교의 모습은 무엇일까?

이찬수 : 종교학적으로 종교는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된다. 하나는 내적 신앙으로서의 종교와 다른 하나는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나서 조직화된 종단으로서의 종교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종교는 후자 쪽에 가깝다. 그러나 사실 겉으로 드러난 종단 내지 종교의 출처는 결국 인간의 내면이다. 뒤집어진 물질세계에 종속되지 않을 인간의 주체성을 끊임없이 회복하는 일이 진짜 종교, 진짜 개혁이다. 흔히 종교가 인기가 없어지는 시대라고 하는데, 그건 ‘종단으로서의 종교’가 인기가 없어지는 것이지, 내적 신앙과 주체성의 확립을 찾으려는 목소리는 오히려 커지고 있다.

이도하 : 서양에서 종교를 의미하는 릴리전(religion)이라는 용어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전제로 해서 출발했지만 동양종교는 근원적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마루 종(宗)자, 가르칠 교(敎)자를 쓴다. 그러니 ‘종교’와 ‘religion’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때문에 종교라고 하는, 나아가 릴리전이라고 하는 틀 안에 우리를 굳이 규정하고 가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과학기술 영역에서도 이미 정신개벽을 이야기 하고 있다. 증강이라는 명제 안에서 엔터테인먼트와 결합되면서 명상이나 영성이 게임을 통해 구현되기도 한다. 그것을 누가 어떻게 조정하고 방향을 잡아갈 것인가? 우리에게 분명 역할이 있지만, 물질의 발달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소태산의 통찰력으로 과학기술을 분석하고, 그걸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이준원 : 물질이 개벽될수록 인간의 지성을 더욱 자극할 것이다. 알파고가 나오니 알파고를 분석하는 프로 바둑기사들이 또 생기지 않았나.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어떤 인간 개인의 지성으로가 아니라 집단지성으로 이뤄낸다는 것이다. 크리에이티브(creative), 창의적 발상이 필요하다. 과거에 가졌던 지성의 벽, 과거 역사의 벽을 깨가야 한다. 소태산도 시대에 맞는 학문을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나.

박윤철 : 그런 시대의 변화에 응답했던 소태산의 저작이 1935년에 나온 <조선불교혁신론>이다. 혁신론의 핵심내용은 시대화·생활화·대중화인데, 이건 종교 혁신을 실천의 장으로 옮겨오려는 노력이었던 것 같다.

이준원 : 한용운 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이 혁신론보다 먼저 나왔고, 소태산은 분명 그것을 봤을 것이다. 그런데 왜 다시 <조선불교혁신론>을 냈을까? 매니지먼트 관점에서 보면 마케팅 기법과도 상통한다. 점진적 개선으로는 안 되고 아예 새집을 짓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걸 기업경영에서는 리엔지니어링이라고 한다.

이찬수 : 기독교권에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다고 하는데, 사실 루터는 종교적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당시 비슷한 의식을 가지고 있던 민중의 요구를 촉발시켰을 뿐이다. 루터가 주장한 표어 중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인데, 그 말은 ‘인간의 구원이, 밖의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태도에 의해 달라진다.’는 얘기를 하려던 것이다. 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한 것이다. 주체성의 확립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주인의식이기도 한데, 그렇게 자연의 원리를 찾으려는 곳에서 과학이 발달하면서 산업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과학문명이 인간을 다시 압도하는 지경이 되었고, 인간은 문명의 주체가 아닌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런 측면에서 소태산이 소수의 불교에서 대중의 불교로, 혹은 외방의 불교에서 조선의 불교로 방향을 전환시키려 한 것은 정말 ‘조선적’인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로 주체성을 추구하려 했던 루터와 소태산의 기본 정신은 통한다.

이도하 : <조선불교유신론>에서는 승려의 결혼 문제를 포함한 형식적인 변화의 요구가 강하다면 <조선불교혁신론>은 ‘등상불 신앙을 일원상 신앙으로’가 키워드라고 본다.  근본적인 혁신이다. 원불교 교리의 특징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누구나, 다 함께, 일상에서, 원만구족’으로 정리해 봤다. ‘누구나 다 함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함께 해야 한다는 대중화의 요청이다. 생활화의 키워드는 ‘일상에서’인데, 일상수행의 요법 등을 통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일상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원만구족’은 시대화의 키워드다. 세 명제를 통합하면 지금 이 순간에 정확하게 실시간 맞춤형으로 존재하는 ‘최적화’, ‘과연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식으로 최적화되어서 존재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본다.

박윤철 :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루터와 소태산 사이에는 공통된 바가 있다. 그게 아마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최적화된 종교, 실시간 맞춤형의 종교를 구현하려고 했다는 점인 것 같다. 그럼 지금 현재의 원불교는 그런 최적화된 종교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이도하 : 교단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저는 어느 정도 낙관적으로 본다. 소태산의 말씀 중에 계속 맴도는 말 중 하나가 “차차 되어지고 있나니라.”이다. 그걸 요즘에 ‘프로토피아’라고도 한다.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기대감은 조금 내려놓고, 교세 확장의 엄청난 진전보다는 역할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모든 것들은 과정이고, 그 과정 안에서 의미와 새로운 발견을 해나가면 된다.

이준원 : 저는 소태산을 종교인이 아니라, 마음과 천하를 다 다스리는 ‘경영인’으로 본다. 여러 큰 기업에는 나름의 바이블(지침서)이 있다. 그 내용을 팀장이 실천하지 않으면 조직의 업무가 실행이 되지 않는다. 리더의 업무행위가 구성원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다 준비를 해놓았다. 우리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낙원이나 천국도 절대 오지 않는다. 그냥 하면 된다. 다만 훈련법대로.

이찬수 : 작년에 개신교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를 했다. 우리말 표현은 ‘종교개혁’이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로는 ‘리포메이션(Reformation)’이다. ‘개혁’을 ‘종교개혁’이라고 번역을 해놓다 보니, 개혁이 교회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사실 500년 전 교회지도자가 사회지도자이기도 했던 시절의 개혁은, 교회개혁을 통한 사회개혁이었다. 경전도 라틴어만 쓰던 것을 당시 대중적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을 해서 사제가 독점하던 진리가 일반인에게 옮겨갈 수 있도록 했다. 사람들이 원하던 주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외부자의 눈으로 원불교를 바라보면, 이 시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충분히 반영한다기보다는, 좁은 의미의 중도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별로 튀지 않으면서 아름답게, 어쩌면 무난히 종단으로서의 작은 모양을 만들어가는 정도로 보인다. 원불교에 대해 특별히 비판할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별로 없다는 뜻이다. 개혁은 사회적 흐름에 맞는 것들이 숨어 있다가 터져 나올 때 이루어진다.

이준원 : 교전을 단순히 해석하는 것에만 그치면 안 되고, 세상 공부과정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잘 알아서 시대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 <정전> 솔성요론 2조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으로 믿을 것이요’라는 말은 집단지성의 시대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내가 리더인데. 내가 교무인데. 내가 종법사인데. 내가 CEO인데.’라는 말로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또, 실천하는 시대다. 소태산은 저축조합과 방언공사 등을 통해 경제적 자립의 모델을 직접 보여주었다. 그리고 시대에 맞게 경전도 한글로 편찬했다. 역사를 연구하면 된다. 거기에 답이 다 있다.

박윤철 : 시대화에 대한 구체적 방법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이도하 : ‘최적화’에 관해서 소태산의 원불교 교리형성과정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소태산은 교리를 만들어서 그냥 인쇄해버렸으면 편했을 것을, 수십 년 동안 수준에 맞춰서 어떻게 하면 한 단어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대중과 ‘함께’ 만들어간다. 일이 많고, 더디고, 튀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어떤 역동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지금의 원불교는 그런 날카로움이 사라진 것 같다.

이준원 : 시중(時中)은 단순히 가운데를 말하는 게 아니고, 때에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여러 기업에 ‘T.O.P를 알면 탑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T는 타이밍(timing) O는 경우·상황(occasion) P는 장소(place)다. 여기에서 O가 바로 ‘때’다. 튈 때는 튀고, 놀 때는 놀고, 말을 할 때는 하고, 하지 않아야 할 때는 하지 않아야 하는 경우를 잘 맞추는 것이 중도행이다. SK그룹에 있는 사람들에게 <원불교교전>을 갖다주면 다들 놀란다. 마케팅 관리의 정의, 방법, 효과는 물론이고 사람 관리 방법까지도 다 나와 있다.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찬수 : 원불교 100년을 앞두고 종단의 혁신에 대한 요청이 컸지만, 그저 그런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종단화된 종교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커진 이유에는 서구적, 혹은 무언가 새로운 보편성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는 사대주의의 영향도 있다. 그런 점에서 원불교가 양적 포교에 성공하려면 우리의 사대주의성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전략적으로 해외 포교에, 제3 세계권 및 구미권에 먼저 공을 들인 후 해외에서 성공한 케이스를 국내에 알리면 오히려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박윤철 : 진정한 의미의 생활화가 소태산이 제시한 대로 구현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보자.

이도하 : 소태산이 일상수행의 요법부터 시작해서 전반적으로 교리 안에 ‘일상’을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일상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목우십도송에서 채찍이라는 각성과 고삐라는 수양의 연속성을 통해 일상의 상승효과를 내는 것이 표현됐다면, 소태산은 정기훈련으로 채찍을 삼고 상시훈련으로 고삐를 삼아 나아가게 했다. 일상과 비일상이 통합된 일상에서 깨달음과 깨어있음이 묻어나도록 한 것이다.

이찬수 : 종교의 생활화란 비일상과 일상을 통합한 정신세계나 영성을 기반으로 한다. 철학의 언어로 하면 주체성이 확립될 때 그렇게 된다. 일상에 휘둘려 살다가 ‘어 뭐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를 묻고 스스로에 대해 확인하고 싶어질 때, 원불교에서 그 답을 찾도록 하려면 원불교적 정체성이 비교적 분명해야 한다. 원만구족이 자칫 두루뭉수리로 비춰지지 않도록 원불교의 일상적 정체성을 좀 더 분명히, 좀 더 뾰족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준원 : 우리 경전에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닌 산 종교’라는 말이 있다. 이걸 다르게 표현해보면 ‘학문과 실천이 둘이 아닌 산 실학’ ‘비전과 상품이 둘이 아닌 산 경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역사에서 혁신의 DNA를 꺼내서 개인은 개인대로, 조직은 조직대로 실행·실천해야 한다.

박윤철 : 대중화가 부정적 의미의 ‘세속화’로 오해될 소지가 있지만 소태산이 말한 대중화에는 사제주의의 극복이 담겨있다. 출가 중심에서 재가·출가가 함께, 남성 사제 중심에서 남·여 사제가 함께라는 의미로, 좁은 울타리를 연 것이 본질이지 숫자나 양의 확장의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이찬수 : 대중화가 단순히 양적 확장은 아니라고 해도 언제나 세속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종단의 경계를 지나치게 개방하면 세속화되고, 지나치게 폐쇄하면 배타주의가 된다. 대중을 향한 종단의 외적 경계는 실선이 아닌 점선이어야 한다. 경계가 있되 대중과 호흡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핵심 안으로 당기는 힘, 구심력이 있어야 한다.

이도하 : ‘공’이라는 표현이 원불교에서 자주 쓰이는데, 주로 빌 공(空)자와 공변될 공(公)자다. 저는 거기에 하나를 더 붙여서 함께 공(共)자를 이야기하고 싶다. 비어있기 때문에(空) 전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고(公),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함께할 수밖에 없다(共)고 하는 공(空)-공(公)-공(共)의 기본적인 맥락이 원불교 대중화의 출발이라고 본다. 대중화와 관련해서 우리가 위축되는 이유 두 가지는 교도 수와 출가자 수의 감소다. 관점을 조금 바꾸면, 교도가 줄어든다는 것은 다른 교화 방식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출가자가 줄어드는 것도 오히려 재가·출가가 함께 할 수 있는 토대로 활용할 수 있다.

이준원 : 대중화를 경영학적으로, 마케팅적으로 볼 때 우리는 ‘멘탈 서비스 마케팅’이다. 사람들의 멘탈(정신)을 돌보는 서비스를 하는데 있어 표준화할 것과 개별화할 것을 잘 구상해야 한다. 개인별 맞춤 서비스를 제공함과 동시에 더 많은 이들이 함께 공감하고 어울릴 수 있는 정형화 된 서비스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박윤철 : 종교학자이자 이웃 종교인으로서 앞으로 종교들이 나아가야 할 역할과 방향, 그리고 원불교에 대한 당부를 한다면?

이찬수 : 좌담을 진행하며 두 가지 모델이 떠올랐다. 하나는 절대평화주의를 내세우는 개신교계 종교 퀘이커다. 1947년에 영국퀘이커봉사협회와 미국퀘이커봉사위원회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규모는 작지만 세계에서 평화사적인 영향력이 굉장히 크다. 원불교가 종단 차원에서 그런 절대평화주의적 정신을 모토로 하면 좋겠다. 사상차원에서는 켄 윌버가 떠올랐다. 캔 윌버는 영성, 과학, 동·서양사상 등을 두루 통합해서 이 시대 사람들이 요구하는 정신세계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논리와 영성이 통합적이고 깊어서 거의 종교라 할 만큼의 강력한 추종 세력이 있다. 원불교가 그런 과학과 영성, 예술, 사상의 통합 시스템을 연구해서 제시를 해내면 좋겠다. 소태산의 언어는 살려가되 합리적 영성에 목마른 현대인들에게 어울리는 살을 붙여내야 한다. 교단 내부의 문제에 급급하기보다는,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종교로서 역할을 좀 더 고민한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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