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총회 회의록에 나타난 원불교의 공공성(公共性) 
글. 박윤철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에서는 ‘공공성’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특히 작금의 국정농단 사태는 한국사회가 ‘공공성’의 측면에서 매우 취약한 사회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근대 한국종교의 공공성 재구축이라는 화두를 안고 고민하고 있는 필자의 책상을 떠나지 않는 원불교 사료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1924년(원기 9) 불법연구회 창립총회회의록(創立總會會議錄)부터 원불교 개교 12년간의 성과를 총결산하는 제1대 제1회 기념총회회의록(第一代 第一回 記念總會會議錄)에 이르기까지 창립 초기 원불교의 중요 회의록을 모은 책자이며, 둘째는 정산 송규 종사가 1937년(원기 22)부터 1938년까지 2년여에 걸쳐 불법연구회 기관지 <회보(會報)>에 연재한 ‘불법연구회창건사(佛法硏究會創建史)’가 그것이요, 셋째는 정산 종사가 1945년(원기 30) 10월에 건국사업(建國事業) 협력의 일환으로 집필한 <건국론(建國論)>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불교를 비롯하여 동학, 증산교, 대종교 등 근대 한국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사람이라면, 또한 한국학(韓國學)을 제대로 공부하려는 연구자라면 그 누구든지 위 세 사료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

  이번 호에서는 원불교 창립초기 회의록에 나타난 공공적 성격, 즉 ‘공공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공성’의 의미에 대해서는 우선 ‘더불어 함께 한다’는 뜻으로 정의해 둔다. 그럼 원불교의 전신(前身)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장으로 들어가 보자.

타이쇼(大正; 日帝의 연호-주) 13년(서기 1924년-주) 4월 29일(양력 6월 1일-주) 상오(上午; 오전)10시에 전북 익산군 익산면 보광사(普光寺)에서 본회 창립총회를 개(開)할 새, 의장 송상면(법명 萬京) 씨 승석(陞席)하여 개회를 선언하고 출석원을 점명(點名)하니 총수 39인이러라. (중략) 차(次)에 임원선거를 행할새 이형천(법명 東安) 씨 동의(動議)로 김성섭(법명 光旋)씨 재청(再請)이 유(有)하여 지명(指名) 선거를 행한 바, 오재겸(법명 昌建) 씨 특청(特請)으로 만장일치 찬동하여 총재(總裁)는 박중빈(朴重彬) 선생으로 하여 본회 지도의 임(任)에 당하게 하고, 회장(會長)은 서상인(법명 中安) 씨로, 평의원(評議員)은 서상진(법명 東風), 박금석(법명 元石), 김성구(법명 幾千), 문정현(법명 正奎), 송상면, 오재겸, 이형천, 전세권(법명 飮光) 제씨가 당선되고, 부장과 간사는 차회 평의원회에 속하다. 

  이것은 1924년 음력 4월 29일에 있었던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회의록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읽으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느낌이 든다. 근대한국에서 자생한 원불교의 교조(敎祖)가 창립총회에서 진행된 선거(選擧)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교주로 추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모르나 동학의 수운 최제우, 증산교의 증산 강일순, 정역의 일부 김항, 대종교의 홍암 나철 등 근대 한국 종교의 교조들은 모두 특별한 ‘종교체험’을 거쳐 스스로교주가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교조도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교주로 추대된 경우는 없다.
  유독 원불교만이 선거라는 공개적 절차를 거쳐 교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는 단언한다. 소태산 대종사가 민주적인 선거 절차에 따라 총재, 곧 최고지도자로 추대된 것이야말로 원불교의 공공적(公共的) 성격, 다시 말해 후천시대가 요청하는 ‘공공종교(公共宗敎)로서의 원불교’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창립총회 회의록에서 확인했듯, 원불교는 창립 당초부터 ‘공공종교’를 지향했다. 참여 민주주의의 실천을 통해 회원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최량(最良)의 지혜를 발굴하여 이를 생활화하고자 한 불법연구회의 노력은 창립총회 이후로도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실천되었다. 구체적 사례를 1928년 5월 31일에 발행된 <월말통신(月末通信)> 제1호에 실린 ‘단원 성적조사법(團員 成績調査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매월 16일에 1회씩 단원의 성적을 조사하는바, 단장이 유(有)한 단에서는 단장이 하고, 무(無)하면 중앙교주(中央敎主; 중앙 단원 -주)가 대리로 시행하여 매년 음 12월 26일에는 본회 교무부에 보고함. 표준양식은 다음과 같음 
공부성적(좌선염불, 교과연습, 취사실행)
사업성적(정신근고, 육신근고, 금전혜시)
의견제출(공부방면, 사업방면, 생활방면)(별색은 필자)

  위 내용에 따르면, 불법연구회에서는 회원들의 성적을 ‘공부’와 ‘사업’ 두 분야 뿐 아니라 ‘의견제출’ 성적까지 조사하여 평가하고자 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불법연구회라는 종교공동체는 그 출범 초부터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 곧 ‘집단지성’(集團知性)에 의해 만들어져 왔음을 증명한다. 또한 이것은 창립 초기 원불교가 모든 회원들이 ‘더불어 함께하는’ 참여 민주주의가 생생하게 작동하는 조직이었음을 보여준다. ‘의견제출’이라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일타원 박사시화 선진은 64세 때인 1930년 1월 16일에 과로에 시달리던 소태산 대종사의 건강을 염려하여 ‘종법원 회객(會客) 시간 제정의 건’이라는 의견안을 제출한다. 이 의견안은 대중 전반의 찬성을 얻어 당일에 즉시 가결되었을 뿐 아니라, 임시회의를 거쳐 회객 시간을 제정함으로써 그다음 날부터 즉각 시행되었다.(<월말통신> 제23호, 1930년 1월 호 참조) 이하에서는 창립 초기 집단지성적인 방식으로 ‘의견제출’을 통해 불법연구회라는 새로운 종교공동체를 모든 회원이 ‘더불어 함께하는 공공종교’로 만들고 있는 자랑스러운 선진들의 모습을 소개한다.
   
  다음 의견심의를 행할 새, 송도성 군이 등석하여 제출된 의견을 소개하니, 송만경 씨의 회채(會債) 보상에 관한 제안과, 박대완 씨의 ‘초 6일 및 16일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간담회를 개하고 본회 전진의 방침을 토의하자’는 제안과, 이준경 씨의 본관 부엌 재를 매일 과정적으로 받아 모으게 하자는 생활 방면의 제안과, 김광선 씨의 감찰원을 선정하여 채용키로 가결된 의견의 시용(施用) 여부를 조사하여 여행(勵行)하자는 제안이 있었고 송봉환 군은 선실 출입시 주의 건을 구두로 제창하였고, 이동진화 씨의 회채 보상에 관한 제의가 있었다. (<월말통신> 10호, 1928년 12월호, 20~21쪽)

  2016년 4월 28일, 전북 익산 중앙총부 반백년기념관에서 개최된 ‘원불교 100
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정치섹션 기조강연을 맡았던 김종철 선생(<녹색평론> 발행인, 전 영남대 교수)은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바 있다. “자본주의의 어리석은 탐욕에 맞서고, 기후변화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다수 민중의 삶을 보호하고, 자연세계를 보존하는 것은 ‘합리적인 정치’이다. 그리고 현 단계에서 합리적인 정치란 온전한 의미의 민주정치뿐이다. 민주주의야말로 유일한 대안이다.”(‘민주주의가 유일한 대인이다’, <녹색평론>149호, 2016년 7~8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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