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잘 계시니?
글. 신수이

  ‘초·중학교 동창인 그녀의 어머니 안부를 한 번쯤 따뜻하게 물었어야 옳았다.’
할 일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못하고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내가 조금 정신을 차릴 무렵, 뜬금없이 드는 생각이었다. 참 생뚱맞다.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은지 수개월째이다. 아마도 나는 그녀의 걱정스런 잔소리를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소 불안정한 성향과 그로 인해 기복이 심한 나를, 그녀는 참 꾸준히도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세상살이에 정답은 없다.”고 말하는 나에게 그녀는 “사회에서 제시하는 가장 안전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종종 내가 잘 되면 내가 정답인 것이고,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녀가 정답인 것처럼 느꼈다. 그 와중에 내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와의 통화는 뻔했으므로 이런 저런 이유로 연락을 놓치고 말았다.
몇 년 전 그녀와 나는 산책을 하고 있었다.
참 여러 가지로 다름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 궁금함의 원인을 먼저 말한 건 오히려 그녀였다. 우리가 제일 처음 접한 어른은 부모였으므로, 아마도 우리는 그들이 항상 완벽하리라 생각하며 커왔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참으로 어린나이에 별다른 경험 없이 부모가 되었다. 그들은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느꼈을 것이고, 그 뜻대로 되지 않음을 지켜보는 우리는 의아함을 품고 살았을 것이다. 그 뜻대로 되지 않음이 우울증이 되는 것일까?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예상보다 심각한 우울증을 지금까지 앓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저런 집안 얘기 끝에 그녀가 던진 한마디는 “나 불쌍하냐?”였다. 내 배려의 최선은 별일 아니듯 받아 넘기는 것뿐이었다. “아니, 누구나 무슨 일은 있어.” 지금 생각해보면 위로도 뭣도 아닌 이 대답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는 달리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비관적인 삶도 잘 살아내는 삶이겠다.’라는 엉뚱한 생각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랬다. 감기를 위장한 내 아픔의 원인은 신체의 면역력이 약해진 탓이 아니라 마음의 면역력이 약해진 탓이었다. 이런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은 겪어봐서 안다고 큰소리치던 나였다. 이런 시기쯤 견딜 만하다고 떠벌리던 나였다. 이런 시기가 길어지면 나도 나를 감당하기 버거운 지경에 이르게 되므로 만나는 사람들과도 오해가 쌓이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오해로 인해 서로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이런 작은 일로도 이 지경인 나를 발견하자 궁금함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름 동생
글. 강별

  매년 여름이면 우리 집에는 온몸에 까맣게 태닝을 하고 머리는 부스스하며 눈에 진한 아이라인을 한 여자애가 온다. 바로 내 동생이다. 런던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방학 때 잠깐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다. 일 년에 한 번씩 보지만 우리는 마치 항상 같이 살던 그때처럼 인사한다.
“왔어~.” “응, 왔어?”
둘 다 호들갑을 떠는 성격이 아니라 그런지 뜨거운 포옹을 한다거나 그런 건 없다. 그래도 동생이 오면 조용하던 우리 집이 왁자지껄해진다. 타지에서 생활하느라 자주 못 보던 둘째 딸이 오니 엄마 아빠도 평소보다 조금 더 신나 하신다.
나 역시 평소에는 퇴근하고 오면 거의 힘들어서 늘어져 있는 편인데, 동생이 오면 최대한 같이 외식도 하고 쇼핑도 한다. 일 년에 한 번 오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걸 하고 자주 대화를 하려고 하는 편이다. 동생은 한국에 와서 향수병을 달래고, 나는 내가 가 본 적 없는 곳의 이야기로 지루한 직장인의 삶에 조금은 자극을 받는다.
외동딸처럼 지내다가 동생이 한국에 들어오면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그래도 하나보다 둘이 낫다는, 진부하면서도 새삼스러운 사실이다. 어릴 때는 동생과 싸우기도 하고 서로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는 동생과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또 자매라서 그런지 말을 안 해도 서로 눈치껏 구는 편리함(?)이 있다.
동생이 온다는 건 고요했던 강에 누군가 돌을 던지는 일 같은 것이어서, 동생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내 지루한 일상 패턴도 조금씩 바뀐다. 나를 조금 더 상대화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달까. 졸업 이후 직장 생활을 하느라 나를 돌보는 시간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동생이 돌아가는 날 새벽, 눈도 채 뜨지 못한 상태로 굿바이 인사를 한다. ‘다시 오겠지.’ 하며 나도 일상으로 돌아간다.
누구나 부모를 잃는다. 누구나 고아가 된다. 혈육이 있다는 건 반드시 축복은 아니어도, 적어도 외롭거나 심심한 일은 아닌 것 같다(물론 혈육도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여야 한다). 이렇게 일 년에 한 번, 가족들이 한 자리에 다 모였을 때 비로소 가족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다. 마냥 안정적이지만도, 마냥 불안하지도 않은 어떤 느낌.
일 년에 한 번씩 이뤄지는 동생과의 만남은 유쾌하고 아쉽다. 동생이 갔으니 한 계절도 간다. 아파트 복도에 캐리어 바퀴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 계절이 가는 소리 같다.


호스트 가족
글. 정혜진

  내 책상 위에는 3년 전 교환 학생으로 미국을 갔을 때 홈스테이를 했던 호스트 가족들과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이 있다.
내가 미국을 떠나던 날 호스트 부모님이 직접 액자에 넣어서 선물해준 것이다. 액자를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나는 늘 그 당시의 미국 생활을 추억하곤 했다. 낯선 땅에서 방황하던 중에 만난 호스트 가족은 나에게 또 다른 안식처였다. 그들과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피부색과 눈동자 색마저도 다른 나를 거리낌 없이 받아주는 가족을 만나서 정말 행운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나는 그들과 SNS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는다.
  18살이었을 때 나는 미국 미시간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1년간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었다. 미국에 대한 환상으로 성급하게 유학을 결정해서 부모님은 걱정을 많이 하셨다. 걱정과는 달리 순탄하게 미국 생활을 했지만 때로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한국과 13시간의 시차가 있는 타국에서 나는 무모한 성격 덕분인지 참 많은 경험을 했다.
처음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을 때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왜냐하면 유머러스하고 친절하며 개방적인 미국인 가정이 아닌, 예민하고 보수적이며 검소한 미국인 가정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처음에 만난 가정은 딸 두 명과 어머니 이렇게 셋이서 사는데 집의 위생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 피부병으로 몇 달을 고생했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홈스테이를 바꾸게 되었다.
그 다음 호스트는 노부부 가족이었다. 그 분들은 친절하셨고 나를 손녀처럼 대해주셔서 좋았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자 강압적으로 내 핸드폰을 관리하고 방에 들어와 내 짐을 뒤지는 등 사생활을 침해하기 시작했다. 대화를 통해 풀어보려 했지만 당신들만의 방식이라며 나를 더욱 옥죄기 시작했다. 권위적이고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아 매일 밤 울었다.
마지막으로 가게 된 집은 젊은 사업가 부부와 해군인 두 아들을 둔 가정이었다. 그들은 한국 문화에 호의적이었고 영어실력이 부족했던 나에게 영어 표현들을 차근차근 가르쳐주며 소통을 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동안 내가 겪은 일들을 공감해 주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미시간주를 벗어나지 못한 나를 데리고 다른 주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경험했으며 과거의 일들마저 추억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가족들과 함께한 몇 달이 너무 행복해서 나에겐 꿈만 같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나는 그 이후로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노력하다보면 그 끝은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벼랑 끝에서 매달려 울고 있는 나의 손을 잡아준 그들은 나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혜이다.


질곡의 시간
글. 김순원

  ‘소태산 대종사님의 법문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 혼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기도를 하는데 김종길 교무님의 따뜻한 법문이 생각났습니다. 법회 때마다 듣는 종소리의 울림이 처음에는 가까이에서 멀리로 퍼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요즘은 멀리서 가까이로 다가오는 듯합니다. 그 종소리가 얼마나 맑고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잠시 잘못 살아온 지난 날들을 뉘우치며 쌓인 업들을 어떻게 소멸시키고 한 단계 더 진급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주어진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너무나 막막하여 스스로를 한탄하고 원망생활을 하며 불평불만이 쌓여가던 어느 날. 생을 포기하려다가 미수에 그쳐 더 큰 순간의 고통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원기 94년(2009) 5월 10일에 마음공부를 처음 시작하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원불교교전>에 담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를 비롯하여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을 처음 읽기 시작한 날이기도 하지요. 그동안 교전 사경을 세 번 했고, 매년 3회 이상 읽은 듯합니다. 일원상 서원문, 일상수행의 요법, 참회문은 하루에도 몇 번씩 틈만 나면 외우고, 명상과 기도는 조석으로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심지(心地)에 요란함이 있는지 없는지, 어리석음은 있었는지 없었는지, 감사생활은 잘 하였는지 등을 하루 일과를 마칠 때마다 늘 내 자신에게 반복해서 물어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에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미묘하여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지는 것이니, 마음공부를 챙기지 않고 어찌 그 마음을 닦을 수 있으리요.”라고 하셨기에, 마음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정신줄을 꽉 잡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느덧 세상과 단절한 시간이 10년이라는 세월로 흘렀습니다. 그동안 마음공부를 단단하게 하고 또 해왔기에 세상 밖으로 나간다 해도 걱정은 없는데, 다만 사람들이 저의 참되고 진실된 마음을 불신하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이 많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부처이니 모두가 부처이리라 믿으며 마음공부를 더욱더 열심히 하면서 쌓인 업들을 소멸시켜 간다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마음공부의 힘이 있기에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지혜롭게 극복할 자신감이 넘쳐흐릅니다.
끝으로 9년째 저에게 따뜻한 보살핌과 지혜를 전해 주셨던 대구 교정교화 봉사회 김종길 교무님을 비롯하여 손법선, 방도웅, 윤양문, 양혜순, 최홍만 등 여러 교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열심히 잘 사는 모습을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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