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고 몰랐기에 ‘탓’이 방패가 됩니다.
30대는 40대를 탓하고, 40대는 50대를, 50대는 60대를, 심지어 60대는 이미 떠나간 세대를 방패 삼습니다. 그게 안 되면 젊은 세대를 탓하죠. 하지만, 탓이 해결책은 아니란 걸, 누구나 다 압니다.

  다시 돌려서 생각해 봅니다.
교단이 바르지 못한 건 늘 탓만 하면서 누구도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교단이 어려운 건 내가 게으르고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원불교의 인지도가 낮은 것은 내가 죽기 살기로 떠들고 다니지 않으면서 안에서만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입니다. 출가교도가 존경 받지 못하는 건 내 편리를 먼저 좇으면서 교리적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재가교도의 믿음이 약한 것은 출가교도를 온전히 믿지 않고 각자의 잣대로 자행자지했기 때문입니다. 교무들이 의기소침한 것은 울타리 밖에서 맘껏 뛰어보라며 길을 열어주지 않고 가두어 살게 했기 때문입니다. 교단 지도력이 약한 것은 구성원들이 지혜를 모으지 않고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면서 위만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총부가 위축되는 건 일선 교당·기관들이 자기 살림만 챙기고 자기 사람만 챙겼기 때문입니다. 교화가 안 되는 건 늘 남 탓만 하면서 고생을 사서라도 하려는 마음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바뀐다고, 제도가 바뀐다고, 환경이 바뀐다고, 개벽이 될까요. 나의 개벽 없이는 세상의 개벽도 없습니다. 그래서 개벽의 일꾼이라고 했나 봅니다. 지금은 이 말마저도 희미해져 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새 세상의 주인은 개벽의 일꾼입니다. 그 일꾼, 지금 어디에서 잠자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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