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유리창

글. 이이원

이야기 하나.

 수계교당 대각전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넉 달 전에 공사를 시작하여 중간에 중단되었으나, 전쟁 중에 교도들의 합심합력으로 전쟁 발발 다음 해인 원기 36년(1951) 6월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기둥 하나 세우면 비가 올까 노심초사하고, 기와는 어떻게 올릴까 고민하며 교당의 모습만 겨우겨우 갖춰가던 그 해 여름 두 달간 정산 종사께서 머무시며 <예전>을 편찬한 예향(禮香)의 도량이기도 하다.

 수계교당 바깥 창은 그때 모습 그대로이다. 삐걱거리고 바람도 드나들어 단열이 여의치 않지만 유리창마다 새겨진 글이 특징이다. 처음에 유리창을 끼워놓으면 누가 빼내 가는지 모르게 빼가는 일이 많았다. 수계교당 것이라는 표시가 없으니 설령 훔쳐간 사람을 잡는다 해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찾은 묘안이 유리창에 뾰족한 돌멩이로 일원상 (○)을 그리고 그 밑에 원불교라는 표시를 ‘ㅇㅜㅓㄴㅂㅜㄹㄱㅛ’라고 새기는 것이었다. 모양도 다르고 때론 삐뚤빼뚤한 글씨지만 기왓장 하나 유리창 하나에 새겨진 믿음은 때론 나태하고 게으른 공부인을 채근하고 있다.

 수계교당에서 만난 한 교도님의 말씀. “저 유리창은 우리 교당 보물입니다. 보물!” 유리창에 새겨진 정신이 그 교도님의 마음에도 새겨진 까닭이리라.


이야기 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후 4시경엔 어린이집 아이들과 만난다. 버스를 타며 배꼽인사를 어찌나 예쁘게 하는지 하루의 피곤이 사라지고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진다. 동네 아이들은 함께 공을 차자고도 하고, 고장 난 장난감을 고쳐달라고도 한다. 이미 아이들에게 교무님은 맥가이버다. 호칭도 처음엔 그냥 아저씨였는데 이젠 모두 교무님이라고 부른다.

 교당을 처음엔 지부라고 불렀다. 마산교당의 처음 이름도 마산지부였는데, 세로로 쓴 뒤 ‘마산’에서 점을 지우면 ‘미신’이 되고 지부에서 ‘ㅜ’ 받침을 지우면 ‘집’이 되니 이어 부르면 ‘미신집’이 된다. 동네 개구쟁이들의 소행이 분명했다.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을 깨고 도망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당시 마산교당 교무였던 범타원 김지현 선진은 아이들의 버릇을 고쳐주고자 유심히 동태를 살핀 뒤 그 중 주동을 할 만한 한 아이를 불러 세우고 말했다. “얘야! 참 멋지게 생겼구나. 너를 보니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 너라면 대통령도 할 수 있겠는 걸!”

 단단히 혼이 날 각오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뜻밖의 칭찬을 듣고 사는 곳을 물으며 먹을 것까지 내어주자 아이는 어리둥절해 했다. 범타원 선진이 말했다. “누가 교당의 간판 글씨를 떼어내어 미신집을 만들었는지 모르겠구나. 혹시 누가 그런 줄 알면 그러지 말라고 좀 해 주렴. 아마 너보다 어린 아이들이 했는가 보다.”

 그 뒤로 ‘미신집’이 되는 일도 없고 유리창이 깨어지는 일도 없었으니, 이것이 마산교당 어린이회의 시작이다. 나도 부지런히 하늘사람 어린 부처님들을 만나며 ‘어린이회’를 만들 꿈을 꾸어본다. “얘들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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