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지혜는 멀고 가까움을 함께 보는 지혜
글. 김정탁

 이전에 넓은 사해도 천지 사이에 있음을 알면 큰 연못에 있는 작은 구멍에 불과하고, 넓은 중국도 바다 안에 둘러 쌓여있음을 알면 큰 창고 안에 있는 곡식 낱알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황하의 신 하백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나머지 천지는 정말로 크고, 짐승 터럭의 끝은 정말로 작다고 말해도 괜찮으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이에 대해 북해의 신 약(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천지보다 더 큰 게 얼마든지 있고, 짐승 터럭의 끝보다 더 작은 게 얼마든지 있어서이다. 그러자 하백이 어떤 게 천지보다 더 크고, 어떤 게 터럭 끝보다 작은가라고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해 약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에 따르면 천지보다 더 크고, 짐승 터럭의 끝보다 더 작은 게 구체적으로 있어서가 아니라 사물의 본래 특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은 사물이 지닌 특성을 네 가지로 말한다. 첫째, 사물은 그 수량에 있어 다함이 없다는 특징이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사물이 멀리 있어 작게 보여도 사물의 수량을 적다 말하지 않고, 사물이 가까이 있어 크게 보여도 사물의 수량을 많다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붕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라 멀리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든 게 작게 보일 텐데, 황하의 물조차 그 수량을 적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현미경을 통해 보면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도 크게 보일 텐데, 사물의 수량을 많다고 말하지 않는다.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사물의 수량에 있어 다함이 없음을 알기에 사물의 수량이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하는 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둘째, 사물은 그 시간의 흐름에 있어 멈춤이 없다는 특징이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사물의 현재와 과거가 서로 향해 있음을 깨달아 사물이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장 사용할 수 없다고 답답해하지 않고, 또 시간적으로 가까이 있어도 당장 사용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사과를 예로 들면 봄철엔 열매가 열리지 않아 이를 먹을 수 없다고 답답해하지 않고, 또 가을철에 열매가 열린 뒤엔 어떻게 따서 먹을까를 힘쓰지 않는다.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사물의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걸 알기에 사물의 시간이 자신과 가깝거나 멀거나 하는 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셋째, 사물은 그 역할이 차례로 변화해서 일정함이 없다는 특징이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사물의 역할에 일정함이 없음을 알아 사물에 역할이 채워지고 비워지는 걸 함께 살핀다. 그래서 사물을 얻어도 기뻐하지 않고, 사물을 잃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귀한 보석이어도 강한 걸 깎는 공구로 사용하는 사람에게 보석이란 역할은 소중하지 않다. 또 쌀은 주식이지만 이를 재산 가치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쌀이 지닌 음식물 역할은 중요하지 않다.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사물의 역할이 일정치 않고 늘 변한다는 걸 알기에 사물에 특정한 역할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넷째, 사물은 그 처음과 끝이 고정되지 않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특징이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사물의 순탄함과 어려움을 분명히 한다. 그러기에 사물이 살아 있다고 기뻐하지 않고, 사물이 죽었다고 재앙으로 여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강아지가 태어나면 귀여워 기뻐하지만 나이가 들어 병이 나면 비싼 치료비 부담으로 후회할 수 있어서다. 새옹지마의 예도 이런 사실을 잘 말해준다. 그러니 있다고 늘 기쁜 게 아니고, 없다고 늘 슬픈 게 아니다.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사물의 처음과 끝을 집착하는 게 결코 가능치 않다는 걸 안다.
 
 이 4가지 사물의 특징으로 인해 아는 바를 헤아리면 알지 못하는 것에 비해 엄청나게 적고, 살아 있는 시간도 태어나지 않은 시간에 비해 엄청나게 짧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아주 작은 것으로 아주 큰 영역을 구하려 하면 정신이 헷갈리고 어지러워져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반면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사물에 있어 수량이 다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이 멈추지 않고, 역할이 일정치 않고, 변화가 끊이지 않다는 걸 알기에 사물의 멀고 가까운 성격을 늘 함께 본다. 그 결과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가느다란 짐승의 터럭 끝을 보아도 아주 가는 것의 끝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또 넓고 넓은 천지를 보아도 아주 큰 거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물론 따지기를 좋아하는 논객은 이와는 반대의 입장이다. 하백도 이런 논객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약에게 묻는다. 세상의 논객들은 ‘아주 작은 건 형체가 없고, 아주 큰 건 둘러쌀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하는데’ 정말이냐고. 이에 대해 약은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은 입장에서 큰 걸 보면 다 볼 수 없고, 큰 입장에서 작은 걸 보면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서이다. 왜 그러한가? 약에 따르면 작은 건 좀 작은 것 중의 작은 것이고, 큰 건 좀 큰 것 중의 큰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작다 크다의 차이를 구분하기는 편한데, 이런 구분은 그저 추세를 따를 뿐 절대적인 구분이 아니다.

 또 작다 크다하는 구분은 형체 있는 것에만 해당한다. 형체가 없는 건 셈으로 구별할 수 없고, 둘러쌀 수 없을 정도로 큰 건 셈으로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말로 논할 수 있는 건 사물의 큰 면이고, 뜻으로 전할 수 있는 건 사물의 작은 면이다. 이 때문에 말로 논할 수 없는 것, 뜻으로 전할 수 없는 건 작다 크다 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대인(大人)의 행동도 이에 입각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큰 사람은 사물의 큰 면만 말로 하고, 작은 면은 뜻으로 전한다. 그리고 말로 논할 수 없는 것, 뜻으로 전할 수 없는 건 말과 뜻을 통해 상대방에게 아예 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큰 사람은 이런 생각을 지닌다. 첫째, 남을 해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베푸는 어짊을 훌륭하다 여기지 않는다. 둘째,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문지기나 종을 천하게 여기지 않는다. 셋째, 재화를 위해 다투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양하는 걸 훌륭하다 여기지 않는다. 넷째, 일을 함에 있어 남의 힘을 빌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기 힘으로 먹고 사는 걸 훌륭하다 여기지 않는다. 다섯째, 탐욕스런 자나 비열한 자를 천하게 여기지 않으며, 행동도 세속과 다르지만 그렇다고 편벽되고 기이한 일을 훌륭하다 여기지 않는다. 여섯째, 많은 사람의 행동을 따르지만 그렇다고 아첨하는 자들을 천하게 여기지 않는다. 일곱째, 세속의 벼슬이나 봉록도 그를 권장하지 못하고, 형벌이나 모욕도 그를 욕되게 할 수 없다.

 큰 사람이 이런 생각을 지니는 건 옳음과 그름으로 분별할 수 없고, 사물을 작은 것과 큰 것으로 나눌 수 없음을 알아서이다. 그래서 도를 터득한 사람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루지 않고, 큰 사람은 자기가 없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한다. 이런 큰 사람들은 스스로의 본분을 지키는 소위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요유>로 옮아갈 필요가 있다. <소요유>에서 무명(無名)을 이룬 성인, 무공(無功)을 이룬 신인, 무기(無己)를 이룬 지인을 언급한 바 있어서다. 여기서 도를 터득한 사람은 알려지지 않아 성인이고,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루지 않아 신인이고, 자기가 없는 사람은 자기가 없어 아무 것도 분별하지 않아 지인이다. 

지금까지 한 약의 말에 혼란스러워진 하백은 사물의 특성, 즉 사물의 수량, 시간, 역할, 그리고 처음과 끝이 변화하는 게 사물의 외면인지, 아니면 내면인지를 두고 묻는다. 또 사물이 어디에서 귀함과 천함이 나누어지는지, 그리고 사물이 어디에서 작음과 큼이 나누어지는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약은 사물의 수량, 시간, 역할, 처음과 끝은 외면과 내면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사물은 귀함과 천함을 나누지 않고, 작음과 큼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도관지(以道觀之), 즉 도의 측면에서 본 결과이다. 이도관지의 입장에선 만물이 모두 같아 귀함과 천함 따위의 구분이 없다. 구분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주관적 판단, 즉 이물관지(以物觀之), 이속관지(以俗觀之), 이차관지(以差觀之), 이공관지(以功觀之), 이취관지(以趣觀之)에 따른 결과이다.

 사람들은 이물관지, 즉 사물의 측면에선 자신은 귀하고 상대는 천하다고 여긴다. 또 이속관지, 즉 세속의 측면에선 귀함과 천함을 구분한다. 귀함과 천함은 자신의 속성이 아니라 외부에서 덧붙여진 것인데도 말이다. 또 이차관지 즉 차이의 측면에선 사물이 조금 크니까 크다고 하고, 작으니까 조금 작다고 여긴다. 이렇게 여기면 만물은 크지 않은 게 없고, 작지 않은 것도 없다. 또 이공관지, 즉 이룬 공의 측면에선 공이 큼에 따라 크다고 하고, 공이 작음에 따라 작다고 여긴다. 이렇게 여기면 공이 크지 않은 게 없고, 작지 않은 것도 없다. 그런데 동쪽과 서쪽은 서로 반대 방향이지만 서로가 없어선 존재할 수 없다는 건 각자의 공이지 않는가? 또 이취관지, 즉 취향의 측면에선 그런 바에 따라 그렇다 여기고, 그렇지 않은 바에 따라 그렇지 않다 여긴다. 이렇게 여기면 만물은 그렇지 않은 게 없고, 만물은 또 모두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성군인 요임금과 폭군인 걸도 취향에 따라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말하지 않는가?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