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1단계

글. 김병렬

 비 내리던 가을날, 여름에 집을 보러왔던 사람이 풍수지리 전문가와 함께 다시 집을 찾아왔다. 이후 2시간 넘게 대화가 이어졌고, 아버지는 제값보다 훨씬 적은 가격으로 집을 팔았다. 전원생활을 꿈꾸고 들어온 시골 마을이었지만, 욕심 많고 이기적인 몇 명의 주민에 의해 풍비박산 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홀가분해 하셨다. 우리 가족도 그 결정에 동의했다. 덕분에 이사까지 두 달이란 시간이 주어졌다. 모든 식구가 모여서 토론을 벌였고, 나와 여동생의 출퇴근을 고려해 두 가구로 나뉘어 살기로 했다. 부모님은 전원생활을 할 수 있는 대부도 단독주택으로 가시고, 할머니와 나, 여동생은 안산 시내에 있는 빌라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두 달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장독대에 낙엽 먼지가 쌓이기 전에 마당과 집 안의 짐을 정리했다. 아까워서 버리지 않았던 물건들이 쓰레기봉투 수십 개에 담겨 나갔다. 맞지 않는 옷, 낡은 신발, 읽지 않는 책…. 추억으로 간직하려고 했던 것들을 그렇게 모두 덜어냈다. 가끔 어떤 물건 앞에서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끼기도 했다. 그 사이 가족들을 졸졸 따라다니던 강아지 똑똑이는 반나절이 지나자 마당에 엎드려 눈만 댕그르르 굴렸다.

 이삿날 아침이 되자 우리 가족은 집을 배경으로 두고 사진을 찍었다. 이삿짐 차는 제시간에 왔고 이사는 조용하고 신속하게 끝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다 같이 빌라에서 밥을 먹은 후 오래 인사를 나누지도 않은 채 춥다는 것을 핑계 삼아 금방 헤어졌다. 할머니, 나와 여동생은 빌라에서 독립의 첫날밤을 보냈다.

 그날 밤, 나는 어두운 방에 누워 낯선 슬픔을 느꼈다. 그토록 입에 달고 살았던 독립으로 한 단계 다가선 것인데, 이토록 힘들고 아플 줄은 몰랐다. 가족과 집을 떠나 먼 곳에서 자취 생활하는 어린 친구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독립하면 더 자유롭고 용감해질 것이다.’란 생각은 내 가슴 안으로 작게 사그라졌다. 어쩌면 부모님은 이런 우리와 당신들을 잘 알고 있기에, 단번에 벌이는 독립보다 한 단계씩 나아가는 방법을 택하셨는지도 모른다.

 겨울 추위가 반짝 오더니 이내 가을의 정상 기온으로 돌아왔다. 빌라는 점점 내게 익숙해질 것이고, 대부도 단독주택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질 것이다. 부모님은 벌써 대부도 집 펜션 사업을 노년 계획으로 세우셨다. 이에 덩달아 우리들의 미래도 그려보게 되었다.

 앞으로 나는 결혼을 하고 또 하나의 가족을 형성하여 나와 닮은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그동안 계절은 다시 또 변함없이 반복될 터다. 이처럼 모든 것은 단번에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연 또한 감기를 앓듯, 한 차례 고통을 겪은 뒤 새 계절의 풍요로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물건들

글. 김도필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전, 먹을거리를 사러 마트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말이어서 구내식당을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목도리를 매고 시린 눈바람을 맞으며 마트에 갔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덕분에 다시 한참을 돌아 용산역 뒤쪽으로 향하는데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냄새가 풍겨왔다. 코를 잡고 어두운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을 때 멀리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것을 보았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운 겨울날, 그것도 허름한 옷을 입고 밖에 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함에 가까이 다가가보니 노숙인 분들이었다. 오랜 기간 씻지 못한 것 같았다. 낯선 풍경의 많은 사람들을 보고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잠시 서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나의 양심은 이렇게 말했다. “외투를 벗어줄까?” 그러나 나의 머리는 “돈 들여 산 옷을 또 다시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 “그럼 돈을 드릴까?”라고도 생각했지만 그게 외투를 벗어주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나 싶었고, 너무 많은 대중이 모여 있는 데다, 막상 받는 분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러지 못했다.
“그럼 난 무엇을 도와드릴 수 있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봐도 어떠한 도움을 드려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도와드려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결국 추위를 피해 도망치듯 역을 빠져나가다가 그 분들이 모여 있는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분홍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죽과 사탕을 나눠주고 있었던 것이다. 막 퇴근한 듯 보이는 사람들도 주머니를 하나씩 들고 오더니 거리의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심지어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일을 거들고 있었다.
‘어떠한 마음이 나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어떻게 이 분들이 여기 있는 것을 알았을까?’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아마 지속적인 관심과 정성, 그리고 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또 그분들이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혹은 자식일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삼학공부를 한다면서 생활에 적용하지 않고 살았던 시간들, 실천으로 옮기지 않고 생각으로만 그쳤던 일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언제쯤이면 나도 저분들처럼 춥고 어두운 곳에 계신 분에게 계산하거나 주저함 없이 은혜를 나눌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쯤이면 모든 사람들이 차가운 바닥에 눕지 않고 따뜻하게 겨울을 보낼 수 있을까? 나도 당장은 형편이 되지 않는 탓에 조끼를 입고 일하는 분들처럼 그들을 도와주지는 못하지만, 여력이 닿으면 힘껏 조력하리라 다짐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가는 길, 추위는 사라지고 부끄러운 물건들만이 마음에 가득했다.


아들의 수능

글. 원종배

 눈을 뜨면 일상이 기도가 되는 요즘이다.
예정대로라면, 오늘은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아들이 삼수 끝에 대입 수능을 치르는 날이다. 경북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수능은 일주일 연기되었고, 마침 나도 오늘은 가게를 직원에게 맡기고 쉬는 날이었다.
하룻밤이 지났지만 갑작스런 발표로 맥이 풀려 버린 가족들. 날이 밝도록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고 있는데…. 아들이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엄마, 지금 시간이면 수학 문제를 풀고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러게 말이다. 기분이 이상하니?”
“응. 모든 게 오늘 하루를 위해 준비해 왔는데 갑자기 연기라니, 어이없어.”
“이건 천재지변이야. 어쩔 수 없지 않니.”
아들의 마음 동요를 짐작하기 어려워 가만히 눈길을 건넨다.
“그렇지. 엄마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일주일 더 공부한다고 큰일 나지 않으니, 괜찮아.”
“그래 고맙다, 우리 아들. 마음 잘 추스르고 힘내자! 오랜만에 맛난 거 먹으러 갈까?”
밖에 나가서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 마음을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니,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거 먹고 싶어. 유부초밥에 만둣국.”
그 말에 피식 웃음이 일었다. 시험 치는 날, 점심 도시락으로 싸주려 했던 유부초밥이 먹고 싶단다. 참치에 김치 넣고 버무린 엄마표 유부초밥.
“아이고! 유부초밥이 그렇게 좋으냐. 해줄게. 얼마든지 해줄게.”

 아들의 반달 눈에 살짝 웃음이 지나가는데, 조그만 행복을 싣고 있다.

 벌써 세 번째 입시를 치르는 아들.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만 할 뿐,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엄마는 그저 바라만 본다.
‘아들!
그 평상심으로 끝까지 잘 해가기를.
너의 앞으로의 일상이 지금처럼 한결같이 여여하기를.
늘 세상의 따듯하고 평화로운 은혜 속에 함께 하기를.
그렇게 빈다.’


고맙고 소중한 사은(四恩)

글. 박연수

 최근에 생일이었는데, 가족들과 많은 친구들이 축하를 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엄마는 생일 선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코케이크와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된 파란색 지갑을 사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챙겨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음에, 참 많은 감사와 고마움을 느낀다.

 고마운 사람은 또 있다. 평소에 친한 친구들을 너무 편하게 생각하다 보니, 나는 가끔 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친구들에게 풀려고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화내지 않고 괜찮다고 말해주며 받아주는 친구들에게 항상 고맙다. 내가 이런 행동을 많이 보이는 것은 가장 편하고 친하게 생각하는 수정이라는 친구 앞에서다. 내가 예민해하거나 우울할 때 늘 옆에서 마음을 다독거려주는 수정이에게 정작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글을 통해서라도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나는 교당에서 회장을 맡고 있다. 부족한 부분도 너무 많고, 그러다 보니 실수를 할 때도 있다. 자칫 의기소침해지기 쉬운 나에게 “괜찮다.”며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수습해주는 교무님과 다른 임원 친구들에게 정말 감사함을 느낀다. 한없이 부족한데도 믿고 따라주면서, 내가 헤맬 땐 함께 그 길을 걸어 가준 덕분에 이번 한 해를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종종 법회 때 설명기도문을 시작하며 ‘저희 모두 이 자리에 모여 함께 법회 볼 수 있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나는 교당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냥 친구가 아니라, 법연으로 맺은 새로운 가족들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착하고 마음씨가 따뜻하고 배려심이 넘친다. 만약 법연의 가족을 고를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온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친구들을 선택할 것 같다.

 감사를 느끼는 대상은 참 여러 가지다. 최근 감사를 느꼈던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신발’에 대한 감사다. 여름훈련이 끝나고 익산으로 돌아오던 길에 물놀이를 하기 위해 해수욕장에 들렀을 때다. 슬리퍼가 물에 젖게 하기 싫었던 나는 맨발로 아스팔트를 걸으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아스팔트가 너무 뜨거워 다시 신발을 신었고, 그제야 그 뜨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이때 처음으로 사람이 아닌 사물에 대해 감사함을 느꼈다. 신발이 있어 한 여름에도 화상을 입지 않고 잘 걸어다닐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삶 속에 이렇게 많은 감사 거리가 숨어있는 줄 그동안 잘 몰랐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천지·부모·동포·법률의 은혜가 모두 필요함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앞으로는 사은님께 더 많이 감사하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감사한 사은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항상 챙겨주고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나의 사은님들!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월간원광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