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업에 따라 육도사생 결정된다지만 그 이전은 의문… 본질은 삶의 자세 문제
글. 박정원  월간<산>부장·전 조선일보 기자

 인간의 근원적인 의문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가.’이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생겼고, 신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있기 때문에 신도 있고, 종교도 있는 것이다. 역으로 인간이 없다면 신과 종교가 존재하겠는가?

 불교는 카르마, 즉 업(業)에 따라 육도사생이 결정되고, 인간의 몸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인간의 생명도 생로병사의 순환에 의해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에서도 인간은 애초 어디서 왔는가와 어디로 가는가의 의문이 계속된다. 기독교에서는 아예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고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더 근원적인 의문으로 ‘조물주는 어디서 왔는가.’를 떠올려볼 수 있다. 조물주이든 신이든 인간이 없으면 그들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를 가지지만, 종교도 이 문제를 여전히 명쾌하게 풀 수 없다. 아마 인간존재에 대한 풀 수 없는 궁극적 의문 때문에 종교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의문은 풀 수 없지만 인간이 죽어야만 하는 문제에 대해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지구, 나아가 우주의 원소량에는 절대량이 있다고 한다. 탄소, 질소, 산소이든지 간에 그 포화상태가 지나치거나 하나의 원소가 지나치게 많으면 지구나 우주는 폭발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이것은 지구생태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선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어야 한다. 죽어서 그 수만큼 다시 태어나고 채우는 순환과정이 지구의 생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죽으면서 부패한 원소들이 지구와 우주를 형성하는 그 균형치를 항상 유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오래 산다든지, 원소의 균형이 무너진다든지 하면 폭발하게 돼 있다. 우주 폭발 이전에 지구 폭발부터 촉발한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그렇게 본다면 생사의 문제를 생태적으로는 명쾌하게 설명이 가능하지만 종교적으로는 오히려 확실히 와 닿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그건 아마 종교가 인간의 본질적 문제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삶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요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 스러짐이니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뜬구름이 본래 실체가 없듯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삶과 죽음도 실체 없기는 마찬가지라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다만 한 무엇이 항상 홀로 나타나
獨有一物常獨露 (독유일물상독로)
담담히 삶에도 죽음에도 매이지 않네
澹然不隨於生死 (담연부수어생사)

 이 시는 나옹 혜근(懶翁 惠勤, 1320∼1376)의 손제자이자 무학 자초(無學 自超, 1327~1405)의 제자인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의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 ‘위비돈영가하어(爲匪豚靈駕下語)’에 처음 나온다. 하지만 기화가 법어를 하면서 혜근의 시를 인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따라서 최초 작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초 기록은 기화가 분명하다. 이 시는 조선 초기 기화 이래 지금까지 불가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숱하게 회자되고 있다.

 생사는 시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 실체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 더 본질적 문제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한 무엇이 홀로 나타나 담담해진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 무엇’은 또 뭘까? 정말 뜬구름 같이 실체가 없는 얘기지만 종교니까 가능한 내용이다.

 삶은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뜬구름과도 같다. 생과 사는 뜬구름처럼 실체가 없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흩어진다. 이것이 존재의 현실이다. 이러한 존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또한 인간이다. 집착과 탐욕, 원망과 회한, 기쁨과 분노와 슬픔 등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삶이라고 받아들인다. 나에 대한 집착과 남에 대한 원망과 분노, 슬픔이 깊어질수록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생사에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눈에 확실히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슬픔과 분노, 원망과 회한도 실체가 있다고 본다. 정말 그럴까? 따지고 보면 실체는 마음 조건에 달렸다.

 필자는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태어나고 죽는 게 둘이 아니라는 사실만 제대로 알아도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어렴풋한 윤곽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윤곽은 내 삶이 윤택해지고 여유가 있을 때 잡힌다. 물질적 여유가 아닌 마음의 여유다. 마음이 윤택해질 때 여유도 생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세상에 초연해진다. 욕심과 집착이 사라지고 불이(不二)의 경지를 알게 된다. 이 정도 되면 인간은 조금 더 겸손해질 것 같다. 경청도 잘 할 것 같다. 
 
 결국은 삶의 자세다. 불교든, 도교든, 기독교든, 유교든 삶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하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불이의 경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아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어렴풋이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긍선(亘璇,1767∼1852)의 <작법귀감(作法龜鑑)> 권하(卷下)에 나오는 말이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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