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지혜와 작은 지혜는 황하(黃河)의 작은 물과 북해(北海) 큰물의 차이다

 ‘추수’는 <장자> 외편 중에서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다.
 장자가 직접 썼다는 내편과 비교해서도 손색없을 정도로 그 내용이 훌륭하다. 이 때문에 ‘추수’는 외편의 다른 내용들처럼 장자의 추종자가 쓴 글이 아니라, 장자가 직접 썼다는 주장이 꽤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지만 글의 형식으로나 내용으로 볼 때 ‘추수’는 장자가 직접 쓴 글이 아니라고 보인다.

 먼저 형식상으로 볼 때, 장자가 직접 쓴 글이라면 내편에 실려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외편에 속해 있는 건 장자가 직접 쓴 게 아니라는 반증이다. 또 내용상으로 볼 때 ‘추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분량이 하백(河伯)과 약(若)이 나누는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내용은 내편 ‘소요유(逍遙遊)’에 등장하는 대붕(大鵬)의 비상과 같은 내용이다. ‘소요유’에 나오는 대붕의 비상이든 ‘추수’의 문답 내용이든 다루는 주제가 모두 큰 지혜(大知)와 작은 지혜(小知)의 차이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소요유에선 큰 지혜와 작은 지혜의 차이를 대붕과 어린 비둘기의 날아가는 높이를 비교해 보여준다면, 추수에선 황하의 신 ‘하백’과 북해의 신 ‘약’이 주관하는 물의 크기를 비교해 보여준다.

 추수는 가을철(秋) 물(水)이란 의미이다. 계절과 관련해서 물을 생각하면 여름을 떠올릴 텐데 왜 가을철일까? 그건 태풍 탓이라 본다. 태풍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즉 8월 말에서 9월 말에 걸쳐 주로 발생한다. 또 중국이 넓은 지역인 점을 감안하면 태풍이 지나가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그렇기에 태풍으로 인해 황하의 물이 불어날 때는 대체로 가을이다. 이 시기가 되면 크고 작은 수많은 강들의 물이 모두 황하(河)로 흘러든다.
하백은 황하를 가득 채우면서 빨리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다른 강들과 비교할 때 자신이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美)을 지녔다고 스스로 감격해 한다. 그러면서 하백은 황하가 흐르는 방향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다가, 결국 북해(北海)에 이르고 말았다. 그 북해는 지금의 발해(渤海)에 해당한다. 하백은 거기에서 동쪽을 바라보는데, 북해가 얼마나 넓은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태풍으로 인해 크게 불어난 황하의 물도 북해의 물과는 그 수량에서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에 낙담한 하백은 북해를 주재하는 신 ‘약(若)’을 향해 속담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백 가지 도(道)를 듣고 그것으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자가 있다.”는 속담이 바로 자신을 두고 한 말 같다면서 말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 지녀왔던 자신의 작은 지혜를 자탄하는 소리이다. 그러면서 큰 지혜의 최고봉에 있는 북해의 신 ‘약’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큰 도를 터득한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뻔했다며 겸손해 한다. 하백은 그동안 매미나 어린 비둘기처럼 낮게 날아 아래를 내려다 본 것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런데 막상 북해를 마주하고 나서야 높이 날아오른 대붕의 큰 지혜가 어떤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여기서 유명한 정와(井), 즉 우물 안 개구리 얘기가 소개된다. 장자에 따르면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해도 알지 못하는 건 자신이 사는 좁은 공간(虛)에 갇혀서이다. 즉 황하의 신 하백이 북해라는 큰 바다를 알지 못했던 건, 우물 안 개구리처럼 황하란 좁은 공간에 갇혀서이다. 물론 머무는 공간만이 문제 되는 건 아니다. 머무는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매미에게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건 그가 사는 시간(時)에 갇혀서이다. 그런데 자신이 사는 시간과 공간 모두에 갇혀서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는 그야말로 바보 같은 존재가 있다. 그 존재가 바로 곡사(曲士), 즉 한쪽으로 생각이 치우친 선비이다. 

 이런 곡사에게는 아무리 도에 대해 얘기를 해도 그걸 잘 이해하지 못한다. 곡사는 자신이 배운 바에 꽁꽁 묶여 있어서다. 어쩌면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런 곡사일는지 모른다. 어디 학자에게만 곡사가 있을까? 정치인, 종교인 등 우리 사회에서 제법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 중에 이런 곡사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지 않는가! 물론 하백도 황하라는 제한된 공간에 갇혀 있을 때는 이런 곡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북해란 큰 공간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곡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 하백에게 대리(大理), 즉 큰 도리를 말했을 때 그가 이해한 것이다. 
 
 이제 북해의 신, 약은 하백에게 자신의 물이 얼마나 많은지를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수많은 하천의 물이 북해로 모여들어 언제 그칠는지 모르는데 북해의 물은 차지를 않고, 또 북해 가장자리의 문에선 물이 언제부터 새어나가는지 모르는데 북해의 물은 마르질 않는다. 그리고 북해의 물은 봄가을로 변하지 않아 홍수와 가뭄이 들어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처럼 북해의 물은 장강이나 황하의 흐르는 물보다 훨씬 많아서 그 수량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약은 자신에게 물이 이렇게 많아도 스스로 이를 자랑해 본 적이 없다고 겸손해 한다. 왜냐하면 물이 많아진 건 자신의 뜻에 따른 게 아니라 천지가 준 형체(形)를 따르고, 음양에서 기(氣)를 받은 결과로 보아서이다. 즉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따라 처신한 결과 이렇게 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약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북해보다 더 많은 물이 있는 큰 바다가 있을 수 있음을 또다시 내보인다. 예를 들어 북해, 즉 발해의 물이 아무리 많더라도 황해의 물에 비하면 작을 것이고, 또 황해의 물도 태평양의 물에 비하면 작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나아가면 넓은 사해(四海)도 결국은 천지 사이에 있는 존재에 불과하므로 큰 연못에 있는 작은 구멍일 뿐이다. 또 넓은 중국(中國)도 결국 큰 바다 안에 있는 존재에 불과하므로 큰 창고 안에 있는 곡식 낱알과 같을 뿐이다. 그러니 하백이 크다고 느꼈던 북해도 천지 및 큰 바다의 관점에서 보면 산에 돌과 나무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천지에서 볼 때 나란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물론 한없이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장자는 이를 다음처럼 표현한다. ‘세상에는 사물의 수가 만 개쯤인데 사람은 그 중 하나이다. 그리고 구주(九州)란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곡식을 먹으면서 살고, 또 이곳은 배와 수레를 타고 다닐 정도로 넓은데, 나는 그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나를 만물에 견주면 말의 몸에 붙어 있는 터럭, 그중에서도 그 끝과 같다.’

 이제 장자는 큰 지혜와 작은 지혜의 차이를 크다/작다, 많다/적다의 물리적 관점을 넘어서 인문적 관점으로 옮기는 시도를 한다. 장자에 따르면 옛날에 오제(五帝)가 천자의 자리를 서로 물려 준 데 반해 삼왕(三王)에 이르러선 천자 자리를 두고 서로 다툰 것, 또 유가적 지식인이 세상을 걱정한 반면 묵가적 지식인이 세상을 위해 애쓴 것, 이 모두는 하찮은 일이다. 그리고 백이(伯夷)는 왕위를 사양해서 명성을 얻었고, 공자는 육경(六經)을 말해 박학하다고 여겨져 온 것 역시 하찮은 일이다. 왜냐하면 백이든 공자든 스스로 뛰어나다고 여기는 건 황하의 신 하백이 자신의 물을 가리켜 여러 강들의 물 중에서 많다고 한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어서이다. 이런 식의 논리 전개는 하백이 깨달았던 대리(大理), 즉 큰 도리가 완결판이 아니라 여전히 과정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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